대왕세종의 장인 심온(沈溫)
1375~1418
조선 전기의 문신.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 아버지는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이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 )가 그의 딸이다.
심온 선생은 요즘 ‘대왕 세종’라는 주말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충녕대군’의 장인이다. 즉 태종의 사돈이자, 세종의 장인이며, 문종의 외할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는 심덕부(沈德符)로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일등공신이다. 평소 왜구 격파에 이름이 높았던 무장으로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를 지지하여 새로운 국가 창건의 주역이 된 심덕부는 청렴과 근면 그리고 온화한 성품으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둘째 딸인 경선공주를 심덕부의 여섯째 아들인 심종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였다. 거기에 더하여 심온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었으니 그가 얼마나 인간으로서 복받은 인물이었던가! 그는 세종이 왕으로 등극했을 때 44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라 더 이상의 지위에 오를 수 없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위치에 있었다.
심온은 고려말에 무과 감시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의 부친 심덕부는 항상 근면하고 청렴하고 공평무사하였기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을 보면서 성장했다. 그래서 고려 조정에 출사해서도 백성을 위한 관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미 고려 조정은 기득권층의 부패와 불교의 타락으로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친 심덕부와 더불어 조선의 건국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고 조선 개국 이후 무반이었음에도 대간으로 언론의 균형을 이루는 일에 충실했다. 그가 1411년(태종 11) 현재의 황해도인 풍해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 그의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바로 풍해도 수군첨절제사 박영우를 파직시킨 것이다. 박영우의 행동이 경박하여 백성들을 수탈하고 군사들 훈련과 병기 관리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수재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고 민심을 위로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심온은 새로운 국가 건설 이후 백성을 위해 제대로 된 정책 추진과 행정을
해야 함에도 관리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강직함은 백성들에게는 신뢰를, 관리들에게는 위엄을 보여주기 충분했다. 태종 역시 그가
자신과 사돈이라는 이유만이 아닌 시대를 이끌어가는 관리로서의 능력과 인품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그를 1413년(태종 13) 조정의 관리들을 감찰하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하였다.
심온은 대사헌으로서 조정을 투명한 권력구조로 제대로 만들고자 했다. 조선 건국의 주도자로서 국왕의 정치 스승이라고 자부하던 하륜의 권력남용이 극심해지자 심온은 그를 탄핵하였다.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 정몽주 살해를 지시하고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국왕의 지위에 올랐던 냉혈한 태종도 감히 어찌할 수 없던 하륜을 탄핵했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감행하였고 태종은 하륜 탄핵을 기회로 의정부의 기능을 폐지하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육조직계제로 전환하였다. 다시 말해 육조의 판서들이 업무를 직접 국왕에게 보고하고 이를 국왕이 처리하는 일이었다. 이는 육조의 판서들이 의정부 삼정승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이를 의정부에서 대부분 처리하고 국왕에게 통보만하는 의정부 서사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제도였다. 태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심온은 새로운 개혁의 추진을 시도하였다. 바로 ‘노비변정도감’의 제조가 된 것이다. 당시 노비중 상당수가 고려 말에 권세가들에 의해 강제로 노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새로운 국가가 되었음에도 태종대에 이르기까지 노비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이들을 다시 평민으로 만들어주는 일은 너무도 중요했다. 하지만 이 일은 기존의 기득권층과 심각한 대립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사업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청렴 강직의 표본인 심온으로 하여금 억울한 노비를 평민으로 환원시키는 국정과제를 수행하게 한 것이다. 노비변정도감 제조와 형조판서를 겸직한 심온은 노비 송사와 관련하여 노비에 대한 애정을 과감없이 보여주었다. 그가 태종에게 올린 노비 신원에 대한 상소의 첫마디는 지금 들어도 가슴이 아련하다. 그의 진정성이 깊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하늘이 백성을 낼 적에 본래부터 양민(良民)과 천민(賤民)은 없었습니다.” 심온은 기득권층의 반대와 회유를 물리치고 자신의 소신대로 노비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양민을 절대적으로 늘려놓았다. 노비에서 해방된 자들의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을 것인가! 그들은 춤을 추며 심온의 결단에 대한 칭송을 노래하였을 것이다. 심온은 태종의 양위로 갑작스럽게 국왕의 장인이 되었다. 태종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하고 셋째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이어 두 달 만에 국왕의 지위를 물려준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조선의 미래를 위한 결단이었다. 세종의 왕비였던 소헌왕후가 지극한 부덕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심온으로부터 배운 교양 때문이었다. 더불어 세종 역시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 사람에게 관대하며 늘 긍정적 사고를 가지고 생활하게 된 것 역시 장인 심온의 영향이었다. 그러니 세종의 국왕 등극에 보이지 않는 일등공신은 바로 심온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 그의 영광과 화려함도 오히려 세종이 왕위에 오르는 순간 막을 내려야 했다. 세종의 등극을 명에게 알리는 사은사로서의 업무를
성공리에 수행하고 돌아온 심온은 국왕의 환영이 아닌 상왕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척 문제로 왕 노릇이 몹시도 힘들었던 태종은 자신의 아들에게는 더 이상의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사돈인 심온을 영의정에 오르게 한지 몇 달 만에 역적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심온은 11살에 무과에 급제한 인물로 평생을 무반으로 살아왔다. 그가 이조판서와 호조판서 등 문신의 역할도 하였지만 그는 아버지 심덕부의 영향을 받아 정통 무신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태종이 병권을 세종에게 주기 위하여 무관인 심온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의 심온에 대한 경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에….
심온은 의주에서 붙잡혀 수원으로 귀양을 와서 상왕(태종)의 명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수원은 그의 아버지 심덕부가 젊은 날 수령으로 부임하여 입신양명의 발판을 마련한 장소인데,
이곳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운명의 사은사 길 떠나는 심온(沈溫)..
세종즉위에 대한 명나라의 승인이 숩게 해결됨으로 승인칙서에 대한
감사를 명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사은사절단이 떠나는 날이다 .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다. 드디어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는 날이다.
사은사 심온, 부사 이적, 주문사 박신으로 구성된 사신이 명나라로 떠나는 날 한양이 술렁거렸다.
대궐은 물론 도성이 들떠 있었다. 왕비의 아버지가 영의정이 되어 사신으로 떠나니 축하의 물결이
넘쳐흘렀다.그 중에서 제일 축제 분위기는 단연 세종의 정비 공비가 있는 중궁전이었다.
심온의 딸 공비가 세종 이후 보위를 이어갈 맏아들 향(문종)을 낳고, 위(수양대군)를 낳은 후,
셋째(안평대군)를 회임하고 있었으니 중궁전은 경하의 연속이었다.
사은사 일행이 경복궁 남쪽 광화문을 빠져나와 육조거리에 모습을 나타냈다.
구름처럼 몰려온 환송객들이 길을 메웠다. 장안의 백성들이 다 나왔는지 구경나온 사람들 때문에
사신 행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육조거리에 늘어선 사헌부와 이조, 예조, 호조, 형조, 병조,
공조 관원들도 일손을 놓고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황토현을 마주보며 행렬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 무렵, 늘어선 군졸들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황토마루에 올라 구경하던 백성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행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잠시 멈추어 섰다. 가까스로 길을 트고 서전문(西箭門)을 지나 경교다리에 이르니 경기감사 조치보가 마중 나와 있었다.
경교(京橋)는 한양과 경기도를 가르는 경계선이었고 경기감영이 있었다. 현재 서대문사거리 적십자병원 봉사관 자리다. 떠나는 사신은 경기감사가 출영하여 환송하지 않은 것이 관례였으나
오늘의 사은사는 어디 보통 사신인가. 왕비의 아버지에 영의정이니 부르지 않아도 자청하여 나와
눈도장을 찍어 두어야 한다.
명나라로 떠나는 사신의 출발점이자 중국 사신들의 도착지점인 경기감영 근처에는 훌륭한 시설과
경관이 좋은 명승지가 있었다. 명나라 사신 공식 영접장소인 모화루를 비롯하여 반송정과 서지(西池)가 있었다. 특히 반송정은 사대부들이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환송받고 싶어 하는 선망의 장소였다.
600여 년이 흐른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디에서 환송받으면 영광으로 생각할까? 개인과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영종도에 있는 인천공항이 아닐까 한다. 일제시대에는 부산항이었다. 일본과 미국으로 떠나는 유학생은 물론 유럽으로 가는 유학생들이 요코하마에서 배를 갈아타기 위하여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탔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평양과 의주를 거쳐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반송정이었다.
큰 우산을 펼친 듯 아름드리 소나무가 일품인 반송정은 서지가 받쳐주어 더욱 빼어났다. 개성 숭교사(崇敎寺) 연못에서 옮겨 심었다는 연꽃이 만발하면 도성의 아녀자들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서지와 어우러진 반송정은 도성 사람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동경의 장소였다. 이렇게 경관 좋은 반송정은 조선 519년 동안 사대부들의 환송 명소였다.
반송정은 관찰사와 목사, 수령 등 관직을 받아 북으로 떠나는 친구, 한양에 올라와 과거 급제하여 금의환향하는 벗, 청운의 꿈을 안고 명나라로 공부하러 떠나는 가족, 사신으로 떠나는 동료 등등 영광을 안고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는 환송객들로 항상 북적였다. 한마디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과 성공한 사람들이 눈도장을 주고받는 장소였다.
세조 때 강희맹은 반송정에서 친구를 보내며 이렇게 노래한 일도 있다. 수레 일산(日傘) 구름처럼 모여 먼 길을 전송하는데,
술잔 소반 흩어지고 황금 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큰길가에 술은 이제 다한 것이, 가고 남는 그 일을 한탄한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나니, 애는 노래 소리 간장을 에이누나. 잠시 후 서로 떠나면 천리 길 멀어지는데, 외로운 연기 저문 날이 창장(蒼莊)하기만 하구나. 경기감사의 환송을 받은 심온 일행이 북으로 향했다. 반송정에서 의주에 이르는 의주대로는 조선팔도 간선도로 중 으뜸이었다.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영남대로보다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 길을 가마 타고 가는 사은사 행차 길은 영광의 길이다. 모든 사대부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반송정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의 환송을 받은 심온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임금 세종이 보낸 환관 최용과 중전이 보낸 환관 한호련이 심온을 연서역(延曙驛)까지 배웅하기
위하여 사신 일행과 함께 무악재를 넘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환관 황도는 창덕궁
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보고했다.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 되어 수상(首相)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습니다.” - <세종실록>
황도의 보고를 받은 태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임금의 장인에 영의정을 겸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라고 이해하면서도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요란한 행차는 국구로서 도를 넘었다고 생각되었다.
태종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왕실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조선 초기에는 환관들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 변질된 내시와 혼동하여 폄하하는 것은 오해다. 가성을 내며 허리 구부정하게 드라마와 영화에 그려진
내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은 환관은 당대의 동량들이 진출하던 관직이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청와대 수석비서관쯤이었을 것이다.
외척발호는 왕권의 적이다
태종은 왕권에 반하는 신하들의 행동을 역적 이상으로 간주했다. 혁명동지이자 개국공신 정도전이
신권을 앞세워 이복동생 방석을 감싸고 돌 때 용납하지 않았다. 건국 26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 왕권이 무너진다면 목숨 걸고 세운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 불을 보듯 빤했다.
고려조의 잔존세력이 살아 있는 현재, 최영 장군과 정몽주를 척살하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듯 보이는 자신과 아버지 이성계도 아차하면 역적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태종이 숨을 거두어 땅 속에 묻히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혁명가의 떨쳐버릴 수 없는 두려움이었으며 숙명이었다.
태종의 숙원사업인 왕권강화를 위하여 외척 발호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생리적으로 척리를
싫어했다. 훗날(심온 사건 후) “척리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에는 참여할 수 없도록 하라”는 원칙을 만든 사람이 태종이었다. 왕자의 난 때 동지로 활약했던 자신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로 처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태종에게 심온의 뒷모습은 불길한 그림이었다. 초석을 다지기 위하여 아들 세종에게 선위한 자신의 선택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왕비의 아버지이고 자신의 사돈이지만 심온의 뒷모습은 묵과할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사돈을 처리하려고 마음 먹었지만 문제가 있으니 구실이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일을 처리하려면
저승으로 보내야 하는데 마땅한 껀수가 없었다. 대충 실록에서 찾아본 껀수라고는 노비 소유권 판결 문제, 환미문제, 양녕대군 문제인데 셋다 오래전 일이고 어디서 일을 엮을만한 구석이 없었다.
역모로 꾸미려면 군사와 관련되거나 해야하는데 심온은 육조판서 중에서 병조판서는 역임하지 않았고 군무에서도 핵심지위는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세종이 충녕대군 시절이던 때 역모가 있다고 하면 그 정치적 책임은 고스란히 세종에게 돌아가기에 아무거나 가지고 물고 늘어질 수 없었다.
사돈 잘 다녀오시라고 전송한 다음부터 짱구를 열심히 굴렸으나 어디 약점이 없었다.
처남은 얼굴색이 변했다는걸 구실삼아서 세자를 끼고 정권을 장악하려했다는 누명을 씌워
저승으로 보냈지만 지금 왕의 장인인 심온에게 그런것도 안 통했다.
하지만 불굴의 태종은 기어코 껀수를 잡았다.
1418년 세종 즉위년에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에 관한 일을 세종에게 보고하고 상왕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을 일이 있었다. 상왕 태종은 세종은 내정을 맡고 자신은 국방과 외교는 직접 맡아서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막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겁을 상실한 강상인이 세종에게만 보고하니 세종은 이를 물리친다. 당연히 열이 받은 태종이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 자신을 무시하는 강상인을 내버려둘리가 없다. 자기가 골방 늙은이가 아니라는걸 보여주기로 마음 먹은 태종의 배려로 강상인은 의금부 특별고문을 풀코스로 만끽하게 되는데 태종이 특별히 '마땅히 단단히 고문을 하되 죽지 않을 한도까지 하라.'고 명을 내린다. 죽이지 말라는 아름다운 배려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죽일거면 단번에 목을 베지 고문하라고 명을 내리겠는가, 죽기 직전까지 고문해도 목숨만 붙었으면 괜찮다는 말로 해석될 여지도 있었다.
이렇게 의금부에서 오랜만에 태종의 심기를 건드린 죄로 절대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당하던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이 튀어 나온건 그해 11월. 강상인이 의금부에 하옥된게 8월 말이고 심온이 떠난게 9월 초니 태종이 전격적으로 일을 진행한 셈이다. 이때 강상인에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대충 살펴보면 군사문제가 세종과 태종 두 곳에서 나온 것에 대한 불만인데 ‘군사(軍事)는 마땅히 한 곳으로 돌아가야 된다.’ 거나 ‘군사가 두 곳으로 갈라져 있다' , ‘군사가 만약 한 곳에 모인다면 허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처럼 상왕 태종이 군사문제에 관여하는데 대해서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군무의 일원화를 원하는 발언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이 발언을 한 사람 중에는 심온도 있었다. 이 일에 심온이 연류되자 조말생은 “두 임금의 부자의 정이 자애하시고 효경하심이 천성으로 지극하심은, 사람들이 누가 모르겠습니까. 전하께서 군무를 청단하심은 오로지 사직(社稷)을 위하신 것이온데, 이 무리들이 군무를 옮기고자 하니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비록 종실과 훈척일지라도 어찌 감히
용서하겠습니까. ” 라면서 강경하게 일을 처리할 것을 주장한다. 사실 이것이 태종의 속내인 셈이다.
여기에는 이종무, 심온, 심온의 동생 심청까지 연루되었다. 여기서 심온은 수괴로 지목된다. 세종은 이 일을 보고 받고 “비록 그렇지마는 상왕의 교지(敎旨)가 이미 이와 같으시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라고 말한다. 장인의 죽음은 예견된 것이지만 어찌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여기에 좌의정 박은이 열심히 태종을 거들기 시작한다. 태종이 사람을 보내서 일을 묻자 “신은 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를 줄 몰랐습니다. 심온이 말한 바, 한 곳은 어찌 우리 상왕전(上王殿)을 가리킨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주상전(主上殿)을 가리킨 것이오니 그 뜻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신도 또한 아뢰올 일이 있으니 마땅히 두 임금 앞에 가서 친히 아뢰겠나이다. ” 라고 거들더니 입궐해서는 심온이 자신을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는 혐의까지 씌운다. 심온의 동생 심청은 고문에 못이겨 심온이 ‘군사는 마땅히 한 곳에서 〈명령이〉 나와야 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하니 태종은 심문을 중단한다. 관련자들의 가산을 봉하고 이욱을 보내서 심온을 체포하도록 한다. 심온은 뒤에 대질한 뒤 처벌하는 것에 대해서 묻자 박은은 죄상이 명백하니 바로 처벌할 것을 주장하니 백관을 모아 강상인을 거열하고 박습과 이관을 목베며, 관련자의 친족들을 귀양보낸다. 박은의 주장이라지만 박은이 태종의 심복인 이상, 이는 태종의 뜻이었다.
강상인 입에서 심온을 비롯한 이들의 이름이 나온게 22일, 심온의 동생 심청의 자백과 함께 심문이 끝난게 23일. 가산을 봉한게 24일. 강상인, 박습, 이관의 처형과, 친족들의 유배가 결정된게 25일이니 태종이 얼마나 일을 서둘러서 처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심씨 집안은 국모가 나온 집안이라는 이유로 천인은 면하고 양민이 되게하는 나름대로 배려을 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잘나가던 명문가가 한순간에 몰락했으니 별로 도움되는 배려는 아니었다. 중전이 된 심씨와 가문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중전 심씨는 로또 대박의 기쁨도 잠깐 집안의 몰락을 힘없이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대인배 태종은 29일에 태연히 세종에게 첩을 들일 것을 논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좌의정 박은을 비롯한 태종의 측근인 원숙, 조말생이 중전 심씨를 폐할 것을 청한다. 아마 태종 이후에 정치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태종은 중전을 폐할 생각이 없으며 단지 빈과 잉첩을 들일 뿐이라는 걸 확실히 했다.
그러나 집안의 몰락은 끝난게 아니었다. 양민이 된 심온의 아내와 딸들은 결국 12월에 4일에 천인으로 격하되고 가산이 적몰된다. 계속해서 심온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의하면서 체포하도록 사람을 보내고 심온이 천거한 사람인 의주 목사 임귀년을 파직하여 심온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았다. 심온 체포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11월 25일에 이욱, 29일 평안도 관찰사에게 대비하게 했으며 12월 5일에는 역관 전의를 보냈고, 12월 18일에는 평안도로 강권선을 보내서 심온을 체포하게 한다. 역관 전의는 중간에 파수보는 관원에게 제지당했는데 이는 그만큼 비밀리에 그리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는 와중에도 심온과 친했거나 심온이 천거했던 사람들은 모두 파면된다. 마침내 노심초사하던 상왕 태종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오니 처음에 간 이적이 심온을 체포한 것이다.
즉각 심문이 시작되고 고문을 당한 심온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는 순순히 자백한다.
심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했다. 심온이 체포된 것이 22일이고
처벌을 결정한게 23일이니 하루만 일이 결정났다. 결국 12월 25일에 심온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때 심온의 나이가 마흔 넷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태종은 세종과 함께 이 일이 빨리 끝난 것을
축하하며 연회를 베푼다.
장인인 沈溫(심온)을 비롯한 처가인 沈氏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모습을 아무 말도 못한 채
눈 뜨고 지켜보아야했던 세종의 기분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더욱이 아버지의 죽임을 들은 세종의 왕비 소현왕후의 심정은..
심온은 왕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죽었으니 억울하였을 것이다. 설마 왕의 장인이 된 댓가가 가문의
몰락과 자신의 목숨이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심온은 과거의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가 죽었지만
사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심온은 처신을 잘한 편이다. 전에 박은이 충녕대군의 왕위계승 가능성을
암시했을 때도 아무말도 안하고 조용히 지낸 것을 봐서 생각이 깊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였지만 설마 사은사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영광과 세도에 빛나던 그 순간에 자신의
파멸이 결정되었음은 몰랐다.
심온과 그의 가문에 대한 신원은 태종 사후 2년 후인 1426년 (세종8년)에 천안에서 심온 가족이 제명되는 것으로 시작되서 서서히 이루어진다. 원래 심온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기에 태종 사후 심온의 직첩과 고신을 돌려주자는 청이 많이 있었다. 마침내 심온은 신원되고 안효라는 신원을 받는다. 가문도 심온의 신원과 함께 다시 부흥하는데 성공하고 심온의 아들 회는 문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심온(沈溫)의 안효공파(安孝公派) 후손들이 번성한다.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와서 일절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은퇴하여 조용히 여생을 살고자 했던 심온에게 역적의 누명이 씌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심온은 세종대부터 의심스런 옥사였다는 신료들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종 1년에 복권되어 안효공(安孝公)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역적에서 다시 공신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권력의 힘 때문에 때론 침묵할 수도 있지만 결코 진실을 숨겨두지는 않는다. 심온의 진실이 태종으로 인해 빛을 잃었지만 그의 손자였던 문종에 이르러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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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청송심씨문중
글쓴이 : 심응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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