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176번지에 위치한 송소고택은 조선시대 영조(英祖)때 만석(萬石)의 부(富)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동에 이거하면서 지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1880년경에 건립되었다.
송소고택은 1985년 12월30일 경북 민속자료 제63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7동이며 99칸이다. 청송 심씨는 조선시대 5백년을 통해 정승이 열 셋, 왕비가 넷, 부마를 넷 씩이나 낳은 사색의 주류인 서인집이다. 고려 때 위위사승을 지낸 심홍부를 시조로 하여 증손인 덕부.원부에서 크게 둘로 갈라졌는데, 이성계의 역성혁명 후 좌의정을 지낸 덕부의 후손이 그 하나요, 새 왕조의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들어가 유훈을 지키면서 선훈불두하여 고향에 산 원부의 후손이 또 하나다. 청송 지방에 흩어져 사는 심씨들은 대개 심원부의 후손이다. 현재 청송에는 심원부의 장증손 심상악씨외 10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데, 덕천 심부자로도 그 명성이 높다.
작은 사랑채에서 바라 본 대문과 행랑채 모습이다. 대문은 솟을대문에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운 홍살을 설치하였다.
큰 사랑채에서 바라 본 대문과 행랑채이다. 집은 옛집 그대로인데 사는 사람은 현대의 사람인지라 문명의 이기인 접시 안테나가 보인다. 현재 고택은 다양한 한옥 체험으로 인기가 높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건 헛담이다. 안채에 드나드는 여자들이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자들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지은 간이 담이다. 헛담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집안 어른이 기거하던 큰 사랑채이고 오른쪽이 후계자인 큰아들이 기거했다는던 작은 사랑채로 나뉘어 있다.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으로 크고 화려하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사랑채 뒤편에 살포시 ‘숨어’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ㅁ’자형. 문간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방과 부엌이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두지, 고방 등이 연결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 왼편에는 첩이 기거하던 별채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공간이 넓은 데다 건물이 미로처럼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어 아이들은 숨바꼭질놀이 하는 것을 좋아한다. 마당에는 손톱만 한 청개구리뿐만 아니라 어른 주먹만 한 두꺼비?돌아다닌다. 두꺼비가 나타날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삽살개들의 모습도 재미있다.
별채은 별도의 공간으로 또 하나의 주거 공간을 이루고 있다. 쪽문이 아니라 정식 대문이며 그에 걸맞게 행랑채도 딸려 있다. 아마도 주인장의 애첩이 머물렀던 공간이 아닌가 싶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심부자의 재력은 9대 2만석으로, 해방 전 일제시대 때도 2만석을 했다고 한다. 조선팔도 어디를 가나 자기 땅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구한 말 개화기 때는 화폐의 가치와 변동이 심해 나라에 세금을 종이로 납부하다가 다시 화폐로 납부하기도 하였는데 그때 은화로 납부하라는 지시에 따라 안계(지금의 의성 안계)의 자기 소유 전답을 처리하여 화폐로 바꾸자니 안계 고을에 돈이란 돈은 전부 모여질 정도 였다고 한다. 또 이것을 청송 호박골로 옮기는데 그 행렬이 10리나 뻗쳤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밤 한밤중 동네 도둑이 든다는 소문을 듣고 집안 식구들은 모두 피신하고 안사랑 마님 혼자서 집을 지키는데 한 밤중에 도적 수 십 명이 몰려 들어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백발의 안방 마님이 나아가 물건을 훔치러 왔지 기물을 왜 부수는가. 내가 문을 열어 줄 터이니 가지고 가고 싶은 대로 가져가라 하며 직접 열쇠를 가지고 광이나 곡간을 열어 주었더니 수십명의 도둑들이 모두 한 짐씩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 후 남은 돈으로 이 집을 지었다 하니 그때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