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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보기힘든 귀한자료 1950년도 소중한 사진들

心泉 심상학 2015. 11. 3. 11:09

보기힘든귀한자료 1950년도 소중한 사진들


귀한자료 1950년도 사진 다수모음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 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비료공장.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 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 돌아올 깁니다.”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
(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 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 1950. 7. 29. 경북 영덕.


 ● 출처 : ohmynews 제공







 

 

 

담당교수 이종석

한국 현대정치사: 한국전쟁의 원인, 과정, 배경 등

 

1. 한국 현대정치사의 의미

 

우리가 흔히 현대정치사를 지칭할 때 다소의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두 세대 정도의 과거로 산정하는 것이 상례인 것 같다. 그러나 한국 현대정치사에서의 현대사는 비교적 선명한 의미부여가 가능하여 해방 전후사라는 말로 대체되기도 한다. 좀더 정확히 구분하자면, 국제회의의 전후 처리과정에서 한국이 거론된 1943년의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으로부터 한국전쟁이 외형상 종식된 1953년까지의 10년이 주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이 시기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 기간이 갖는 비극성 때문이다. 역사란 감동의 순간을 기록하여 후세에 활력을 주는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감격보다 슬픔이 더 깊이 인간의 가슴에 각인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기를 더욱 주목하게 된다. 여기에서 비극이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의미한다. 이 비극성이 너무도 저리기 때문에 해방의 감격도 상쇄된 채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회한(悔恨) 시대로 묘사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거쳐 냉전의 씨앗인, 이념이 당사자들의 고통스러운 명상의 결과가 아니라 지리적 운명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맞다.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자가 되고 북쪽의 사람들이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그들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운명적이고 속지주의적(屬地主義的)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설령 남한과 북한에서 그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타율적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이주가 허락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길들여지며 반세기가 넘는 강요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폐쇄사회의 북한과 다양성이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남한, 특히 집단최면에 걸린 북한에서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무리는 역사학자들일 것이다.

 

속단하기에는 다소 성급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이념을 볼모삼아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指鹿爲馬;지록위마) 말하던 시대는 사라졌다. 다양함, 열림, 그리고 강요된 이념의 굴레가 거의 걷힌 이 시대에 우리는 한국 현대정치사를 다시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제 우리에게는 암울했던 시대보다 더 많은 고뇌와 창의, 그리고 용기가 필요한 시대를 맞은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남북통일이라는 공동선을 향해 함께 갈 수밖에 없다.

 

2. 한국 현대정치사의 추이(推移)와 동인(動因)

 

1) 지적 탐구심의 증가

 

해방 전후를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풍조, 즉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경험으로서의 해방’이 아니라 ‘역사로서의 해방’을 탐구해 보고자 하는 지적 갈망은 한국의 현대 정치사 연구에 1차적인 동인이 되고 있다. 한 인간의 생애에서 그의 지적 확인과정은 정보와 경험이 그 주축을 이루고 있다. 버바(S. Verba)의 주장처럼 사람의 지적인지(cognition)는 그의 태어난 환경(family), 그의 학업과정(school), 어울려사는 주변인물들(peer group), 그리고 정보의 외압(mass communication)이다. 이 네 가지의 변수 중에서 가정환경과 또래들은 전적으로 체험적이거나 아니면 간접체험의 요인들이지만 학업과정과 정보는 전부 지적 전수에 의한 것이다. 한국의 해방 전후 세대들은 현실 인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체험과 지적 전수의 사이에 상당한 괴리를 느끼면서 사고의 혼선을 느껴왔다. 따라서 현실문제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초미(焦眉)의 관심이 되고 있는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의 문제는 어렸을 때의 전문(傳聞)이 자신의 성숙과 더불어 그 내용이 하나의 허구라는 인식을 그들이 갖기 시작 했을 때 더욱이 그러 할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사실의 목격자가 아니며 지난 일들을 자기의 마음속에 재연할 뿐이며, 목격자로서의 부모나 선배의 경험담은 이제 그들에게 의미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결국 이들은 기성세대의 경험담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해방 전후사를 해석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진보주의적 좌파들이 그러했듯이 한국의 청년 좌파들은 기성세대가 헛된 삶 또는 잘못된 삶을 살아 왔고 죄 된 삶을 살아 왔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달리 생각해 보고 싶은’(to think otherwise) 충동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이 해방 이후의 기성세대들이 저지른 여러 가지 실수들, 특히 도덕적 타락과 정치윤리의 결핍은 기성세대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불신과 배척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제 청년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의 시각에 따라서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해방 전후사가 주요한 주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2) 한․미관계가 주는 교훈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1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은 그 성격상 다음과 같은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수교로부터 을사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기간(1882-1905)이다. 이 당시의 양국관계는 전적으로 미국이 이니셔티브를 잡고 있었다. 이 기간의 미국의 대한정책은 미․중관계의 개막을 위한 기항지의 의미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당시 미국에 대한 한국의 의미는 종속변수(從屬變數)였고 미․중관계, 그리고 그 후의 미․일관계가 미국의 궁극적 관심이었다. 그러던 것이 1905년 7월의 ‘테프트가츠라밀약’(Taft-Katsura Agreement) 이 체결되면서 제1기의 한․미관계에서 미국이 가지고 있던 인식은 구체적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미국은 대한제국 멸망의 묵시적 방조자였다. 이 제2기의 망각의 시대는 1945년 8월까지 계속되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새로운 한․미관계의 제3기가 열렸다. 이 당시 미국은 한국의 해방․독립․분단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시기였다.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당부분에 걸쳐 미국은 한국의 분할점령에 책임을 져야하는 시기에 그들은 지혜롭지 않게 한국문제를 처리했다. 이 제3기에 대한 해석이 한․미관계의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행한 시대를 거쳐 한국전쟁과 더불어 한․미관계의 밀월의 시대가 열렸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사망 2만 1,300여명, 부상 5만 3,100여명, 포로․실종 4,400여명의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미국의 건국이후 최대의 전쟁 피해였다. 적어도 남한 국민들 사이에 이와 같은 희생은 ‘혈맹(血盟)의 우방’이라는 표현으로 무리없이 받아들여졌고, 이러한 의식은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으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체험의 역사였지 역사적 의미부여는 박약한 것으로 일부에서는 판단한다. 이 시기를 한․미관계의 제4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밀월의 시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계속되었다. 그러던 것이 한국의 전두환 정권시절인 1985년이 되자, 한․미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미 해방세대가 학업을 마치고 기성사회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제는 체험의 역사가 아닌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들은 한국의 현대정치사에서 미국의 실수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목소리는 미국문화원(美國文化院) 점거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를 한․미관계의 제5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청년 진보주의자들은 한․미관계 100년사에 걸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응어리처럼 지식인 사회에 팽배하여 왔던 반미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역사적 증빙으로서 분단의 책임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 점이 정치학자들로 하여금 통탄의 심정으로 한국의 남북분단사 연구를 가속화시키기에 이구의 여지가 없다.

 

3) 남한의 민주화

 

한국의 제6공화국의 출범을 계기로 어슴프레 나타나기 시작한 민주화의 추세는 분단사 논쟁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전후 40년에 걸쳐 분단 또는 북한 정권의 존재는 독재정치의 볼모였다. 제1공화국은 북진통일이라는 허구로써 국민적 결속을 도모했다. 이승만은 한국적으로 윤색된 매카시즘(McCarthyism)과 오도된 통일염원으로써 정적들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후대의 지도자들과 비교하여 볼 때 이승만이 민중적 염원을 탄압하는 데 더 가혹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는 민중의식이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될 만큼 성숙되지 못했고, 바로 직전 한국전쟁을 체험한 그들은 반공논리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지도자의 논리가 곧 그 시대를 대표한 것이다.

 

이어서 4․19혁명 직후의 상황은 통일논의의 민중적 기반이라는 면에서 볼 때 분명히 의미 있는 시기였다. 그것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민중의식의 맹아기(萌芽期)였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한국 국민들은 ‘나 의식’(I-consciousness)으로부터 ‘우리 의식’(We-consciousness)으로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이후 1961년의 군사혁명은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우파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시기에서 북한의 존재는 지배자를 위한 ‘필요악’이었다. 북한으로부터의 가상침략은 정치적 탄압의 구실이 되었으며, 정치적 긴장이 필요했던 지도자에게는 통일논의나 남북의 접근이 오히려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남북 지도층의 이해관계는 서로 합치되었다. 이와 같이 암울했던 세월은 민족중흥이니 유신이니 하는 명분과 함께 20여 년간 계속된다. 이 시기 비록 유신 독재자라고 하기도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이라는 인물의 지도로 ‘한강의 기적’이라고도 하듯이 경제적인 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다. 수출역군과 산업화 세대 등의 공로로 한국 국민들은 보릿고개가 해결되는 긍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어서 1980년에 시작된 ‘서울의 봄’은 한국 정치사의 불행과 함께 끝나고 다시 한국은 우파 군부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정통성의 면에서 3, 4 공화국보다 더 기반이 취약했던 5공화국의 정치적 탄압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가혹했다. 사태를 악화 시킨 것은 그들의 도덕성의 결여였다. 지배층이 우파 보수주의로 체제를 강화하고 있을 무렵 민중의 의식은 상대적으로 좌경화하고 있었다. 이 두 세력의 갈등은 평화적 정권교체와 더불어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특히 1988년은 통일논의의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해였다.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는 그들 자신의 결심에 의했던 민중적 통일논의의 성숙에 의한 것이든, 타의적 양보였던 간에 통일논의의 개방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적 민주화는 통일논의와 공산권 자료의 개방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더구나 24회 올림픽 경기는 종전과 달리 공산권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게 되고, 이제 ‘역사해석의 국유화’의 시대가 서서히 사라지고 이때부터 통일논의는 성큼 앞당겨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게 되면 한국 현대 정치사 연구의 열기는 한국의 진보적인 정치․역사학자들에 의해 점화된 것이라는 칭찬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때로는 무례했고 편식(偏食)했으며, 학통을 혼란케 하는 경솔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실수로 인해 그들의 공이 묻힌다고는 보지 않는다.

 

4)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와 소련의 개방

 

소련의 붕괴는 한국의 정치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한 이념의 붕괴가 가져온 여파와는 별개의 것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사료의 공개였다. 본시 전쟁이라는 것이 다국 간에 입체적으로 전개되는 것이어서 일방의 자료로써는 그 진상을 밝히기가 어려운 것이며, 특히 이념의 윤색이 짙은 한국전쟁은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정확한 조명을 위해서는 또 다른 일방인 소련과 중국의 자료가 필요하던 차에 소련의 한국전쟁 문서가 공개된 것은 지극히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의 학계에 배포된『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는 2종이 있는데, 하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옐친(Boris Yeltsin)으로부터 기증받아 와 한국의 외무부가 1994년 7월에 배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신문사의 ‘파일’(1995, mimeo)이다. 이 문서들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 문서를 선별적으로 한국에 보냄으로써, 사실을 은폐했다는 심증은 가지만 사실을 날조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자료는 사실확인(fact-finding)을 위해서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3. 한국분단을 보는 시각: 원인론과 책임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신생한 여러 국가들은 그들의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 괴로움을 겪었다는 점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의 현대 정치사는 남다른 아픔을 안고 있다. 특히 역사상 미증유(未曾有)의 참상을 보여준 한국전쟁은 분단을 고착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상처는 어느 전쟁보다 깊었다. 이 비극은 대부분 그 원인이 있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을 열면서 남북의 해빙무드가 전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통일의 가능성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통일의 미래가 불투명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지금의 국내외적인 상황이 1945년의 그것에 비하여 더 나아졌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에 관한 논의는 분단의 원인을 되짚어 보는 데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의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다면 분단 극복의 답안이 거기에서 도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주변 강대국의 책임인가?

 

역사의 원인을 천착하는 것은 누구를 정죄(定罪)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음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현대 정치사의 연구는 분단의 원인 또는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의 질문에 집중되고 있는데 그 시각은 크게 보아 전통주의․수정주의․신전통주의․신수정주의 등 네 가지로 나누어지고 있다.

 

한국의 분단문제를 먼저 다루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서방(미국) 학자들이거나 그곳에서 공부한 한국인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자료가 역사의 당사자인 한국보다 가해자인 미국측에 더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의 현대 정치사를 탐구함에 있어서 ‘왜’(Why) 한국은 분단되었는가, 또는 ‘왜’ 한국전쟁은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문제를 풀어 나가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대체로 상황논리에 빠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상황논리와 함께 한국의 6․25전쟁의 기원에 대하여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1) 전통주의론

 

흔히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 또는 보수주의자(conservatives)라고 불려지는 이들 논리의 기본적인 입장은, 미국의 당초 구상이 한국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는데 상대편(주변) 강대국에 의해 일이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분단이라든가 한국전쟁과 같은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으며 군사적 편의주의라는 말로 분단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분단의 책임으로 제시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야욕에 관한 부연 설명이다. 결국 이들의 핵심 논리는 소련 또는 북한이 한국분단의 제일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연속선상에서 하나의 화두(話頭)로 제기된 것이 한국전쟁의 개전 이유였다. 전통주의자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소련의 동의를 받아 ‘남침야욕에 빠진 김일성이 고요히 잠든 일요일 새벽’에 쳐 내려 왔다는 한 줄짜리 문장으로서 한국전쟁을 설명하려 했다.

 

전통주의 학파는 주로 이데올로기적 접근방법을 취했고, 수정주의 학파는 주로 경제적 접근법을 취했다. 그러므로 그 결론은 큰 차이를 나타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전통주의자들에 의하면, 이 전쟁은 스탈린의 세계화전략의 일환으로 났으며 스탈린은 제2차 대전의 승리의 열매로 동유럽을 공산화한 뒤 아시아로 눈을 돌려 마침 중국대륙의 공산화에 성공한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을 자신의 ‘아시아 보좌역’으로 삼고, 함께 모의한 결과 북한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 내각 수상 김일성(金日成)을 ‘하수인’으로 내세워 취약지역인 남한을 침략했다는 논리이다.

 

(2) 수정주의론

 

반면에 수정주의자들은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았다. 이들에 따르면, 이 전쟁을 일으킨 쪽은 미국으로서 미(美) 제국주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하수인으로 내세워 북한을 침략하게 했으며, 또는 북한을 침략하기 위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으며, 이 침략전쟁이 성공하면 중국으로까지 확전시켜 중국공산당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을 무너뜨리고자 했고 심지어 소련과의 제3차 세계대전도 사양하지 않으려고 했다. 특히 전쟁에서 늘 이익을 보는 미국의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줄어든 군비를 확대시키기 위한 계기를 한반도에서의 전쟁도발을 통해 마련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론으로, 우파 전통주의자들이 제기한 그 ‘한 줄짜리 설명’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한국전쟁은 남쪽의 선제공격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논거를 제시했다. 즉 해주(海州) 전투의 비밀이다. 사건의 내막을 보면, 1950년 6월 24일에 이미 남한 육군 17연대(연대장 백인엽; 白仁燁 대령)는 해주까지 진격해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북침설의 논거는 당시 남한의 각종 신문이나 New York Time, 육군본부의 발표 등이 17연대의 북진을 보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가세한 부르스 커밍스(Bruce Comings)는 지리적으로 볼 때 “옹진(甕津)은 남한이 북한을 침략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때는 의미가 없다. 북한은 옹진을 점령해도 남쪽이 바다이기 때문에 남진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남한이 옹진을 점령하면 곧바로 평양을 노릴 수 있기 때문에 옹진은 남한에게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남한측이 옹진반도를 통해 북침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17연대는 38도 이남의 옹진반도에 주둔해 있다가 해상 남하가 불가능하여 육로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온 것이 북침으로 보였다는 주장, 백인엽의 가족사(家族史)의 문제가 연루되었다는 설 등 아직 학술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주장이 있고, 최근에는 이를 최초로 발설한 육군본부 김현수(金賢洙)대령의 오보이며, 김일성 자신이 이를 부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이 아니라는 반론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수정주의자들의 입장은 미국이나 남한이 한국 현대 정치사에의 비극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기본적인 정서는 우익에 대한 혐오감이다. 결국 통일도 미국의 의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확대되는 것으로서 이는 또 다른 사대주의를 낳을 위험을 안고 있다. 따라서 한국 분단의 책임을 부분적으로 미국에게 물을 수는 있지만 이는 냉정하고도 정직한 답은 아닐 것이다.

 

(3) 신전통주의론

 

신전통주의 학파에 따르면, 6․25전쟁은 분명히 북한과 소련 및 중공의 공모에 따른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신정통주의자들은 이 전쟁을 발의한 장본인으로 스탈린을 지적하지 않고 김일성을, 그리고 박헌영을 비롯한 그 밖의 북한 정치지도자들을 지적했다.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은 남한이 미(美)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파악하고 그러한 남한을 해방해야겠다는 사명감에서 민족해방전쟁을 구상한 뒤 일차적으로 소련의 스탈린을, 이차적으로는 중국의 마오쩌둥을 끈질기게 설득해 동의와 지원을 얻어냈다고 신정통주의자들은 설명한다.

 

(4) 신수정주의론

 

반면에 신수정주의 학파에 따르면, 이 전쟁은 한반도 내부에서 오랜 동안 성장한 계급적 갈등의 ‘정점 도달(頂點 到達)’이다. 신수정주의자들에 따르면, 조선왕조 말기 이후 조선에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갈등과 확대되어 가던 중, 민란이나, 대중반란의 형태로는 폭발하거나 해소되지 않은 그 시기, 일제는 조선의 지배계급과 손잡고 식민통치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이 때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투쟁한 민족해방세력은 일차적으로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이차적으로 해외의 우익적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드디어 해방 이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 되었다는 논리이다. 이와 함께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은 남한의 수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민족해방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신수정주의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논리 이외에 다른 논리들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예외 없이 자신들의 논리전개 출발점을 한반도 내부의 요인들에 두고 있다.

 

(5) 필자의 입장

 

여기서 우선 반드시 강조돼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위에서 살핀 네 가지 해석들 가운데 어느 한 해석만이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해석들은 전적으로 그르다는 인식을 처음부터 갖는 것은, 분단과 전쟁의 본질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중 두 번째 해석, 곧 수정주의 해석은 거의 맞지 않다. 그러나 나머지 세 가지 해석들을 놓고 보면 맞는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을 함께 지니고 있다. 둘째, 이 해석들의 이념적 명명(命名)은 지난날에 비해 점점 무의미해 지고 있다.

 

따라서 필자의 입장을 밝히라고 한다면, 신전통주의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신수정주의학파의 설명들 가운데 자료에 근거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지만, 필자의 분석은 전반적으로 신전통주의학파의 설명들에 부합된다. 쉽게 말해, 본인은 이 전쟁을 ‘소련과 중공 및 북한의, 특히 소련과 북한의 공모와 침략으로 일어났으나 내전적 요소들을 안고 있었던 국제적 전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라고 밝혀 두고싶다.

 

2) 한국은 책임이 없는가?

 

한국전쟁이 가지는 냉전적 요소를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부 지식인들은 주장한다. 한국전쟁의 내전설을 주장하는 신수정주의 입장은 전쟁의 첫 발포자의 책임을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 신수정주의자들도 1950년 6월 25일의 개전이 김일성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1945년 전후에 한국이 안고 있던 ‘동질성의 파열’이 분단과 전쟁의 치명적인 원인이었다는 논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분단의 책임이 상당부분 우리에게 있다는 논리는 한반도의 운명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던 강대국들, 특히 미국이 한국의 정치인들을 지극히 불신했다는 사실이 한국의 분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 분단의 원인과 책임을 따진다면 ‘민족분열’이 ‘독립변수’였고 국제적 환경은 ‘종속변수’였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분단은 나누어짐(division)이 아니라 헤어짐(separation)이었다.

 

해방 정국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한국은 고착화 과정의 분기점이었다고 할 수 있는 신탁통치 여부와 관계없이 내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내재적 갈등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찬탁․반탁의 어느 쪽의 당위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느 한 쪽으로 국민적 의사의 합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데에 해방 전후사의 비극이 있다. 물론 당시 한국인들의 국론이 통일되었다 하더라도 미․소는 분할정책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통일 의지가 강했더라면, 또는 당시 지도자들이 사욕을 떠나 민족의 내일을 걱정하며 역량을 발휘했더라면, 미․소의 분할정책에 관계없이 한국은 분단을 극복했을 것이다. 이 점이 분단의 한국책임론의 논거이다.

 

“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 우선 그 스스로가 멸망할 짓을 한 후에 다른 나라가 그를 멸망시킨다”(國必自伐而後 人伐之; 국필자벌이후 인벌지)라는 孟子(맹자)의 말씀은 한국분단사에 대한 불멸의 교훈이다.

 

요컨대 분단의 논쟁이 안고 있는 약점은 한국의 지식인들의 책임논리가 사실에 빗나간 채, 내가 아닌 남(미국과 소련 등)을 원망하는 데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안고 있었던 분단의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감정적인 접근방법이다. 1945년 전후의 역사에 관한 국내외의 자료를 검토해 보면 분단의 원인은 역시 상황논리(왜?)에서 검토되어야 하며 책임문제를 따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먼저 ‘나’ 자신의 흠을 안 연후에 ‘남’을 원망해야 할 것이다.

 

3) ‘탓의 역사학’ 으로부터의 해방

 

한반도 분할이나 한국전쟁 등 한국정치사의 일련의 비극을 설명함에 있어서 강대국의 냉전이나 영토적 야심 또는 구체적으로 미국의 실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식의 설명은 결국 통일의 열쇠도 강대국에 있다는 논거를 가능케 하는 것이며, 이는 한국의 통일운동에 하나의 장애요소가 될 것이다.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했기 때문에 분단이 초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이 맞다고 볼 때, 한반도가 공산화가 되었을지언정 통일만 되어 그것은 지금의 분단 상황보다는 좋은 조건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분단이 미국의 책임이라는 논리는 옳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책임론의 진의는 결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한반도 분단이 미국의 책임론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은 미국이 한국의 분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논의의 원점으로 다시 돌아와 말 하건데,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에 따른 한반도의 미․소 분할 점령은 한민족의 의사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독립만을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기다려 온 한민족의 정당한 염원을 짓밟은 강대국의 횡포이다. 즉 한반도의 분단은 일차적으로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 곧 국제형 분단인 것이며 따라서 그 책임은 미국과 소련에게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임의 문제에 관해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 제국주의에게 원천적 책임을 묻게 된다.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지만 않았더라면, 한반도가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비운은 없었을 것이며,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미증유의 참상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신복룡, “한국현대사 연구의 시각과 방법론의 검토”(서울: 오름, 1998).

김학준, 『한국전쟁: 원인․과정․휴전․영향』(서울: 박영사, 2003).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s),『한국 현대사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서울: 창비, 2004).

이상우,『국제정치학강의(International Politics An Introduction)』(서울: 박영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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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토지사랑모임카페
글쓴이 : 김 선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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