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 제53호
소재지 :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13-10
[靑松沈氏 安孝公(청송심씨 안효공 묘역)]
沈溫(심온, 1375~1418)선생은 朝鮮初期(조선초기)의
문신으로 字(자)는 仲玉(중옥)이며, 世宗(세종)의 府院君(부원군)이다.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의 아버지로 조선 왕조가 시작된 이후 세종 대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한 沈溫(심온)의 묘이다.
심온은 靑松(청송) 심씨로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 왕조 창업에 참여하였다.
조선 태종 11년(1411)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학정을 일삼은 관리를 파직시키고
大司憲(대사헌)이 되어서는 관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
이후 戶曺(호조), 吏曺判書(이조판서)등을 지냈으며, 그의 사위였던 충녕대군이
세종으로 즉위하면서 딸은 昭憲王妃(소헌왕비)가 되었고 국왕의 장인으로서
領議政(영의정)이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兵權(병권)만은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는 철저한 외척 배격 정책을 썼다.
심온의 막내아우 湞(정)이 태종의 병권 장악에 불만을 품고
"명령이 두 곳에서 나온다"고 당시 병조판서 朴習(박습)에게 말했는데
박습이 이 말을 태종에게 고하자 심정은 국문을 당하고 그 배후로 심온이 지목되었다.
[홍살문]
태종 18년(1418)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은 국왕의 장인으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 등이 거짓으로 꾸민 사실이 후에 밝혀지게 되어
세종은 관직을 복직시키고 安孝(안효)라는 諡號(시호)를 내렸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석등과 좌우에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안평대군이 글을 쓴 묘비가 있다.
[沈溫先生墓(심온선생 묘)전면도]
조선조 500년을 통해 淸松 沈氏(청송 심씨)는 정승이 13명, 왕비가 3명,
임금의 사위인 부마 4명을 낳는 등 四色(사색)의 주류인 西人(서인)의 집으로 혹은
왕실의 외척으로 이 나라 정계를 주름 잡았었다.
청송 심씨의 相臣(상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13명은 전주 이씨 22명,
동래 정씨 17명, 안동 김씨 15명에 이어 네 번째가 되지만 이 가운데
영의정이 9명이나 되어 영의정 수로는 전주 이씨 11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다.
또한 왕비 3명은 청주 한씨 5명, 여흥 민씨와 파평 윤씨가 각각 4명 그 다음이 청송심씨다.
이 통계만 보아도 이조 시대에 청풍 심씨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와 세도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沈溫先生墓(심온선생 묘)]
청송 심씨는 고려 때 衛尉寺丞(위위사승)을 지낸 沈洪孚(심홍부)를 시조로 하고 있는데
그의 生卒(생졸) 연대나 행적은 기록을 失傳(실전)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청송 심씨의 世系(세계)는 크게 둘로 갈린다.
시조 심홍부의 증손은 沈德符(심덕부)와 沈元符(심원부) 형제가 있었는데
형인 덕부는 이성계의 역성 혁명을 도와 좌의정을 지내면서 자손들이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하였다.
[사당과 재실]
반면에 동생인 원부는 새 왕조의 벼슬을 마다하고 杜門洞(두문동)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자손들에게 이씨의 녹을 먹지 말라고 유훈을 하였다.
그 자손들은 그 유훈을 지켜 先訓不仕(선훈불사)라 하여 대대손손 고향에 살면서
벼슬을 멀리 하였다.
[安孝祠(안효사]
현재 경북 청송과 영남 일대에 퍼져 살고 있는 심씨들 대부분은 원부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형집인 덕부 집안을 <서울집>이라고 부르는데 많은 정승과 文衡(문형),
왕비들은 모두 서울 집 출신들이다.
오늘날에도 각계에 활약하는 저명 인사 대부분이 서울 집 심덕부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심덕부는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이들로부터 자손이 번창하여 일곱 개 파로 나눈다.
그 중에서도 넷째인 沈澄(심징)의 仁壽府尹公派(인수부윤공파)와 다섯째인 沈溫(심온)의
安孝公派(공효공파) 후손들이 번성하여 굵직한 벼슬을 도맡아 했다.
[明堂水(명당수)]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다가 압록강을 넘자 체포되어 수원에서 사위인
세종이 내리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일화에 의하면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가 자손들에게 남기실 말이 없냐고 묻자
그 자리에서 받아쓰게 한 것이
"吾子孫世世忽與朴氏相婚也(오자손세세홀여박씨상혼야)"였다.
이 말은 "내 자손들은 대대로 혹시라도 박씨와는 서로 혼인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유언은 불문율로 후손들에게 지켜져 왔고 설사 박씨와 결혼한다 할지라도
아들을 못 낳아 대가 끊기거나 융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심온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의 아들 澮(회)는 아버지가 사사되었다는 이유로 등용되지
못하다가 문종 때 영의정을 하였다.
[정원]
이에 심덕부와 심온, 심회로 이어지는 3대 정승을 한 것이다.
역사상 3대 정승을 한 집안은 달성 서씨, 청풍 김씨, 그리고 청송 심씨 세 집뿐이다.
청송 심씨 정승 13명 중 9명이 심온의 후손들이며,
대제학 2명, 왕비 2명, 부마 1명이 모두 심온의 후손들이어서
심온 묘가 明堂(명당)임을 말해 준다며, 옆지기가 열심히 설명을 한다.
[神道碑(신도비)]
묘역 아래에는 9대손 심하단이 글을 짓고
서명균이 글씨를 쓴 神道碑(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다녀온 곳이 명당이라지만, 명당에 관한한 별 다른 느낌이 없기에..
묘에 관한 글을 잘 올리지 않지만, 특별히 내 눈에도 좋아보이거나,
귀에 익은 분들의 묘에는 관심을 가지고 보고, 다녀온 곳도 올려보기도 하였기에
靑松沈氏 安孝公 沈溫 墓역도 올려봅니다.
묘 주위가 작은 동산을 이루며 공원같이 아름다우며...
깨끗하게 보존하고 손질한 모습이 뚜렸했으며,
정원의 아름다움 또한 明堂水(명당수)와 조화를 이루어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진. 글 / 초아(안내판과 인터넷 참조)
[음악 / 국악 / 블루맨님]
2007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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