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천, 심상학 시집 '시의 데이트’
추천 서평(초고1)
문학평론가 l 한정 박민철
시인 ‘몽테뉴(프랑스의 사상가)’는 기도는 하늘에서 축복을 받고 노동은 땅에서 축복을 파낸다고 한다.
추천 서평(초고1)
문학평론가 l 한정 박민철
시인 ‘몽테뉴(프랑스의 사상가)’는 기도는 하늘에서 축복을 받고 노동은 땅에서 축복을 파낸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내면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부터 선하게 정화해야 하는 것이다.
항상 좋은 생각을 하고, 남을 위해하지 않으며, 간음하지 말아야 한다. 항상 자연의 눈으로,
행복으로 가득 찬 우수의 눈은 심천 심상학 시인처럼 시와 데이트를 한 멋진 눈망울의 선한 세계를 세상에 조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는 잊고 있는 인간 존재의 불편한 진실들이다.
‘날 것 그대로의 사실, 현실 그대로의 진실’ 만약 시인의 그윽하고 추상어린 눈길이 없었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낭만과 묘미들이 과연 그 재미와 독특함이 있었을까?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문턱에서부터 이미 특정한 틀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문턱에서부터 이미 특정한 틀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그 결과로서 조형되는 ‘사실’ 또한 이미 특정한 색깔로 인생이 채색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나의 색깔을 얼마든지 마법처럼 농우화. 옅게 할 수 있다.
그 방법론으론 우선 특정한 색깔에 물들지 않는 것,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할 것,
그리고 독단적으로 탈바꿈되는 것을 방지하는 고집쟁이의 반대, 예찰 행위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대는 행운을 선물 받을 자격이 없다.
아니 아직 준비되지 못한 자는 사람으로 행운을 주어도 발견을 못하거나 그 자신이 실제 찾아내지 못한다.
데일 카네기(인관관계론, 자기관리론) 역시,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데일 카네기(인관관계론, 자기관리론) 역시,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인생에서 인생을 거의 다 놓치고 만다고 논한다.
우리가 잘 아는 이솝 우화에서도, 불교 철학에서도, 유태인 격언에서도, 모든 종교에서 그것의 삶,
비우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면, 절대 새로운 것을 가지를 못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버리는 행위는 불교 철학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얻는 참선의 올곧은 이치와 같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개인이든 사회 공동체이든 가슴 뜨거웠던 공동체는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개인이든 사회 공동체이든 가슴 뜨거웠던 공동체는
국가도 슬픔에 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 사회의 집단 쏠림 현상, 사회적 병리 현상의 의식, 문제 또한 바뀌어야 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 이때이다.
바로 ‘시와 데이트를 해야 할 시간이 지금이다’, 그래서 나를, 국가를 편안하게 이끄는 행위는
우선 나 자신이 도덕적이기 이전에 다른 사람을 먼저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라 최고의 관건이다.
화는 그저 화만 불러 큰 재앙으로 다가오고 오해는 그저 더 큰 오해만 낳는 세상이다.
그래서 덕망의 진리는 순수의 세계를 찾는다.
안식과 평화는 단 한 사람의 개인으로 주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다,
국민은 국민으로서 군인은 군인으로서 각자의 모든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라를 용서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무던히도 발전하려면, 작금의 세월은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미워할 사이가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넉넉히 용서하고 화해해야만 우리 국민 모두가 편안하고 남과 북이 민족적인 대동단결 속에서
국가와 개인이 영원한 평화에 안착할 수 있다.
그래서 ‘박정은’ 작가는 용서는 타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박정은’ 작가는 용서는 타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감추고 싶은 비뚤어진 속내를 꺼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고 지나간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어두운 과거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그것에 대해 용서를 하지 못할 경우 비뚤어지고 뒤틀린 마음은 그냥 쉽게 풀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타인을 위해 베푸는 행위가 아니라 실제 나 자신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문학 역시도 용서 속에서 자연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행위다.
그 곳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자연과 타협하며 지나는 세월의 주유가 나의 한수, 신의 한수,
인생의 시름을 위로하며 벗한다.
그래서 개인이나 국가나, 문신이나 군신이나, 사서육경(四書六經)에서도 온갖 난관을 겪어야 했으며
그래서 개인이나 국가나, 문신이나 군신이나, 사서육경(四書六經)에서도 온갖 난관을 겪어야 했으며
그 어느 누구가 그 많은 집필을 하든, 도를 닦든 간에 인간은 높은 선의 경지, 신비의 경지에 오를 수 없음을 탓한다.
오직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인간은 그저 낮은 자세로 임하며 인간 자체를 사랑하고 순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과로 인간은 허영 덩어리이며 욕심 덩어리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그 어떤 마음이든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양손에 쥔 욕심을 반드시 버려야
다시 새것(새로운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강물이 흐르는 진짜 이유는 마음이 흘러가야 새것이
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 심상학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헤어짐이라고 작품에서 말한다.
시인 심상학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헤어짐이라고 작품에서 말한다.
사랑의 아픈 역사도 역사는 역사다. 그것이 허구이든 갈망이든 한 개인의 역사도 역사다.
그것이 사랑이든 추억이든 행복이든 꺼내어 놓으면 모두 영화가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일장춘몽이다.
그래서 인생은 영화와 같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사랑도 헤어짐도 익어서 지나면 다시 상처는 아물고 새롭고 정화된 성숙된 마음이 다시 친구처럼 찾아온다. 그래서 친구라는 말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
절대 몸이 알아서 스스로 익히지 않는다.
절대 몸이 알아서 스스로 익히지 않는다.
사랑을 하던 사업을 하던 간에, 그 누가 무엇을 하든 간에, 숙달되지 못하거나 낮 익지 않는
몸은 실패의 깨달음을 많이 되돌리는 입장이다.
자기 자신의 대단한 노력 없이 얻어진 단순한 결과는 결국 성공에 이르지 못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능성은 반복에 정비례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가면 된다.
노력과 지혜는 그 어떤 사상도 따라가지 못한다.
문학적인 작가 역시도 배 일배는 모두 생각은 마찬가지이다.
시인이 되는 길 역시도, 오직 탐구하고 노력하고 자신이 진지하게 학구 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결과물이다.
시인이 되는 길 역시도, 오직 탐구하고 노력하고 자신이 진지하게 학구 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결과물이다.
문학인으로서 소양의식을 자주 닦아내는 일은 위대한 찬사의 거룩한 일이다.
항상 꿈은 움직이는 것이고 펼쳐질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삶에서 그냥 안주하는 삶은 절대 발전하지 못한다.
고정 관념이란 나의 인생을 실패의 날개로 잘못 끌어들일 수 있기에 우선 나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서
낙천적인 삶을 위치하라. 인간에게서 꿈을 찾는 일,
그 가능성을 찾는 일은 실패에서 실패로 얻어진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래서 우주의 조화, 생각하는 인생의 승리자는 바로 우리 최고의 인간들인 것이다.
시인이 글을 쓰고 수필가가 수필을 쓰는 행위는 목적의식의 행위가 아니다,
시인이 글을 쓰고 수필가가 수필을 쓰는 행위는 목적의식의 행위가 아니다,
그저 읊고 놓는 것 같아도 그것은 독서와는 그 맛이 다르다.
실제 작가가 되어 보지 못한 사람은 느낄 수 없는 희명이 있고, 글을 읽는 행위와 글을 쓰는 행위는 실제
그 희열, 그 맛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독서는 수많은 책장을 넘겨 상당한 시간을 확보하여야만
자신이 상상력을 펼쳐 하나의 결론에 이르러 나 자신의 사고(가치관)를 올바르게 얻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심천 선생처럼 깊은 사유와 더불어 나의 관념과 철학을 비교 교차하며
그러나 시인은 심천 선생처럼 깊은 사유와 더불어 나의 관념과 철학을 비교 교차하며
현실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경위가 많으며 마지막 사색의 은유에서 나만의 청작과 개성이 담긴
이론적 체험적 삶이 문학으로 표출된다.
실제 어떤 사람은 화술은 뛰어난데 비해, 또는 아는 것은 많아 말은 잘하는 편인데도 이론의 정리를 잘 하지 못하며,
실제 자신의 추론하거나 강변의 글을 토해 놓아도 그것의 올바른 이론을 글로서 써 내지를 못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 나 자신이 글을 짤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정작 그러한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이해하면 되고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내 자신의 역량까지만 그것을 이해하면 된다.
문학을 이해고 사랑하는 행위는 보통의 사람의 식견이 아니다.
남이 하나를 생각할 때 그 사람은 두 가지 세 가지 관념으로 해석해야만 작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으며
삶의 이상을 나 자신과 비교 교차하며 조화롭게 채색해 내는 것이 작가이다.
내 생각을 외부로 표현할 때 하나의 문학적 정의는 운문과 추상의 문장 속에서 은유가 가미되어야 하기 때문에
내 생각을 외부로 표현할 때 하나의 문학적 정의는 운문과 추상의 문장 속에서 은유가 가미되어야 하기 때문에
시인이 꺼내는 이채로운 말은 그저 신비롭게 까지 하다.
결과로 ‘문자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그림도 그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書不盡言 圖不盡意)’는 사자성어가 있다. 문자의 언어는 도구로서의 본래적 제약이 항상 따라 온다는 것이다.
또한 글이 길다 하여 그 뜻이 더 잘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돌려서 말하기도 하고,
일부만 말하여 여백을 살리기도 하고, 아예 말을 하지 않는 방법 묵언 수행을 최고의 인간 가도,
인생 이치로 말하여 놓는다.
심천 선생처럼 문학에 대해 적극적인 사고와 생각을 갖는 것은 외부의 자극, 하나의 자극이 아니라
심천 선생처럼 문학에 대해 적극적인 사고와 생각을 갖는 것은 외부의 자극, 하나의 자극이 아니라
자 자신의 관념적 철학과 사상에서는 나온 이론 철학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을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참 문학인의 존재이다.
오늘을 사는 현실의 작가로서 다양한 개채의 현대시를 써는 행위는 그렇게 쉬운 문학 장르가 아니다.
시조時調는 운율과 운문이 함께 귀결되어 있으나 그 시를 한글로 번역하였을 때
시조時調는 운율과 운문이 함께 귀결되어 있으나 그 시를 한글로 번역하였을 때
음절과 음보를 다 갖추어내기가 어려운 작품들도 많다.
원래 시조가 원래 노래가사였듯이, 그리고 당시대를 나타낸 시절가時節歌 이었듯이,
오늘을 퇴색해 내는 우리 현대의 사가들은 읽기도 쉽고 개성도 뚜렷한 작품들을 많이 선호한다.
그래서 시의 갈래는 오늘날 수많은 세상의 자아를 아름답게 펼처낸다.
결과로 자아는 누구나 밝혀낼 수 있는 것.
그래서 시는 결코 범접하지 못할 그런 어려운 문학 코스가 아니다.
심천 선생이 하나의 자연을 음미하고 인생의 철학을 비교하고 나의 우정을 띄워가며
심천 선생이 하나의 자연을 음미하고 인생의 철학을 비교하고 나의 우정을 띄워가며
나 자신이 봄꽃보다 더 붉은 가을 잎의 절정을 내 가슴에 띄우면 그만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나의 생각들을 덧칠하고 날개를 달아주면 시인의 역할은 그만이다.
이제 하나의 주제를 단 작품은 비록 시인, 작가가 글을 썼다 하지만(그 시는 작가의 이름을 달았지만)
정작 생활 측인 면에서 그 시는 시인의 시가 아니라 독자의 시로 다시 잉태되어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시를 쓸 때 항상 그 시의 주제 섞인 특성을 설정하고 그리고 작품의 날개를 달아주면
그래서 작가는 시를 쓸 때 항상 그 시의 주제 섞인 특성을 설정하고 그리고 작품의 날개를 달아주면
이제 남은 역할은 독자의 몫으로, 독자의 책무로, 독자의 생각에 의에서 창작의 세계를 다시 열어내는 것이다.
그 시가 며칠 동안 바람을 피었다 질지라도 시인은 진정어린 글을 써야한다.
밥을 먹을 때도 시를 써야하고, 사랑을 앓을 때도 써야하고, 민중의 억압된 진리 속에서도
항상 시인은 돌팔매를 맞아가면서도 글을 써야한다,
그러한 삶의 철학을 인생의 진리로 받아들이며 장구한 세계를 펼치게 되면
독자는 그 작품에 반하여 또아리를 틀며 민감하며 가슴의 무연을 사랑으로 채찍질 한다.
그레서 세상의 모든 꽃들은 화무십일홍이다.
그레서 세상의 모든 꽃들은 화무십일홍이다.
그 화려한 절정도 금세 지워지고 기억에서 지워지고 만다.
그래서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자연도, 인생도 사실이 그럴진대, 어디 문학작품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진정히 빛나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것이 과연 몇이나 되려는가?
그러나 시인이며 사진가인 백승훈 작가는 맨드라미는 불꽃처럼 타올라 여름내 뜨락을 환히 밝힌 뒤에도
붉은 빛을 고이 간직한 채 조용히 가을 문턱을 넘어 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 생각의 영화는 어디까지 가면 멈춰질 까?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 생각의 영화는 어디까지 가면 멈춰질 까?
만약 자신이 120살 까지 살아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진정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다.
실제로 존망자체로 장수하는 사람도 많으며 인생의 마지막 열정, 그 꿈같은 현실을 태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한 개인의 생각과 이론 끝에 누리는 차이는 엄청나다.
비록 작은 것일 지라도 실천의 결과는 영원한 영수와 나의 행복을 비치도록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뜨거운 지구의 용광로는 아직도 꺼지지 않고 불타오른다.
뜨거운 지구의 용광로는 아직도 꺼지지 않고 불타오른다.
자신이 갖는 승리의 결과는 당신 자신의 행위나 실천에서는 그 마지막 행의 큰 빛이 되고 거름이 되고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세상은 온통 흑 빛 투성이지만 아직도 꿈이 출렁이고 있다.
아직도 꿈이 춤추고 있을 때 현실의 도라이몽이 아닌 우린 꿈을 잡아야 하고,
그 꿈을 노래할 때, 우린 그 삶이 당신 위주로 나 자신의 위주로 움직이면 얼마나 좋으련가?
너무나 유명한 다산(茶山 조선 시대의 학자인 정약용의 호)선생이 폐인이 다 되어가도록
너무나 유명한 다산(茶山 조선 시대의 학자인 정약용의 호)선생이 폐인이 다 되어가도록
연구한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행위를 우린 어떻게 남겨야 하며 평가해야 할까?
학자를 떠난 한 개인의 삶, 그 자신의 삶이 얼마나 혜안과 번민으로 가득 찬 고통속의 비몽사몽 이었을까.
행운은 요행이라는 말과 결이 달라서 생활의 설렘은 기다림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이 행운을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그렇다면 다산 선생이 진정 자기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글을 썼을까?
진정히 행복한 백성의 나래를 위한 글을 썻을까.
그렇다면 심천 선생의 시의 데이트는 당신을 위한 데이트일까? 나 자신의 데이트일까?
그 물음과 답이 바로 다산 선생의 이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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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문학상 원고 접수: 편집부 pj1275@hanmail.net
이달의 시인, 수필가 상 : 편집부 010 6489 1245
기획 제작 출판부 02)809-8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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