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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송 심씨(靑松 沈氏)

心泉 심상학 2008. 12. 31. 10:30

청송 심씨(靑松 沈氏)는, 고려 중엽 1100년대 (12세기) 에, 중국 북송 절강성 지역에서, 심공좌(沈公佐, 일명 : 심현좌<沈賢佐>)가, 그의 아버지 심충(沈忠), 아들 심수정(沈守貞) 과 함께, 고려로 귀화한 성씨입니다.

지금의 청송 심씨(靑松 沈氏)의 시조 심홍부(沈洪孚)가, 심수정(沈守貞)의 아들 이라고 합니다.

'심(沈)' 씨는,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왕자 '희(姬) 담계' 가, 중국 남부지방에 제후로 봉해졌는데, 그곳의 지명을 따서, '심(沈)' 씨로 개성하면서, 생겨난 성씨입니다.

'심(沈)' 씨의 원래 성씨는, '희 (姬)' 씨입니다. '심(沈)' 씨 의 직계 조상인 주(周) 문왕(文 王)도, 성명이 '희(姬) 창(昌)' 으로, 성씨가 '희 (姬)' 씨입니다.

또한, '심(沈)' 씨는, 중국인들의 시조로써, 중국인들 모두가 최고로 떠받들고 있는, 고대 중국 곰 토템부족 유웅국(有熊國)의 왕 소전(少典)과 소전의 차남 이며 소전의 왕위를 계승 황제 헌원(黃帝 軒轅)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황제 헌원(黃帝 軒轅)은 처음으로, '희(姬)' 씨로 개성한,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 입니다.

그리고, 황제 헌원(黃帝 軒轅)은, 소전(少典)의 장남인 염제 신농(炎帝 神農)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염제 신농(炎帝 神農)은, '강(姜)' 씨로 개성했는데, 우리 한국인들의 시조라고 합니다.

그리고, '강(姜)' 씨가 성씨들 중에서는, 최초로 생긴 성씨로써, 가장 오래된 성씨라고 합니다.

우리 고조선의 왕 단군 왕검도, '강(姜)' 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하튼, '심(沈)' 씨는, 중국의 왕족 성씨이고, 모든 중국인들에게 최고로 추앙 받고 있는 황제 헌원(黃帝 軒轅)과 그의 후손 주(周) 문왕(文王)의 직계 후손으 로써, 중국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성씨입니다.

'심(沈)' 씨는, 강(姜) 씨 다음으로 가장 오래 된 성씨인 '희(姬)' 씨가 원래의 성씨인만큼, 최고의 성씨입니다.

 

요약 설명

심(沈)씨는, 우리나라 256개 성씨 중 총 가구 순위 31위로, 인구 수는 매우 적은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현재에 들어와서는,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등의 고위 공무원에 선출되거나 임명된 인물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조선조에는,그 위상이, 지금 현재와는, 완전히 달랐다.

조선조 씨족 전체의 문벌 순위를 따져 보면, 김씨 (김해 김씨 제외) 가 51명 의 정승을 배출 하여 1위이고, 그 다음으로,이씨 (조선 왕족 전주 이씨, 연안 이씨,인천 이씨 제외) 가 38명 으로 2위, 정(鄭)씨 (서산 정씨 제외) 가 30명 으로 3위, 윤씨가 18명으로 4위, 심(沈)씨와 홍씨가 각각 15명으로 공동 5위, 박씨가 13명으로 7위 등등이다.

 

씨족 전체로 문벌을 따져 보았을 때, 심(沈)씨는, 홍씨와 함께, 조선조 5대 벌족(閥族)인 것이다.

고려조까지 따진다면, 김씨, 이씨, 정(鄭)씨, 박씨, 홍씨, 윤씨, 최씨,유(柳)씨, 조(趙)씨에 이어, 심(沈)씨는, 한씨와 함께, 한국의 10대 벌족이다.

 

이는, 심씨 의 인구수가, 타 씨족에 비해 매우 적다는 점과 심씨의 우리나라 에서의 연원이,  타 씨족에 비해 매우 짧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대단히 놀라 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沈)' 씨는 최고의 성씨이다.

공자 (孔子) 의 '춘추전 (春秋傳)' 과 중국의  '고전 성씨부(古傳 姓氏部)' 를 보면, '심(沈)' 씨는, 고대 중국 유웅국 (有熊國) 의 전설적인 제왕'황제 헌원 (黃軒' 의 후손이며, '주(周) 문왕 (文王,성명은 '희창<姬昌>')' 의 후손인데, '은 (殷, 일명 : 상<商>)' 나라 말기(기원 전1100 년대) 에, '주 문왕' 의 10번째 왕자 '희 담계 (일명 : 시숙<時叔>)'가, 중국 남부 '심(沈)' 이라는 지역에,제후로 봉해지면서, 처음으로, '심(沈)' 씨 성이 생겨났다고 기록 하고 있다.

 

그리고, '심(沈)'나라 (일명:심자국<沈子國>) 가 건국된 지, 약 500 여년 후인 춘추 시대 말 <이 시기의'심(沈)' 나라의 군왕은 '심형(沈형)' 이었다.>에,인접 제후국인'채(蔡)' 나라에게 멸망 당하면서, '심(沈)' 나라의 왕족 일부가, 중국 동남부 절강성으로 도피하여,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제후, 토호, 명문 사대부로 지냈다고 한다.

 

그 일례로, '심청전(沈淸傳)' 의 모태 설화 (원형 설화) 인 우리 나라 전남 곡성군과 중국 절강성에 전해져 내려오는 '원홍장 설화 (심청 고사)' 를 들수 있다.

 

중국의 정사 진(晉)서 열전 후비전과 우리나라의 '관음사 사적기' 모두,백제 고이왕 말년 인 서기 286년에, 백제 곡나(곡성) 오곡면 송정마을(도화촌)에서 태어난, 봉사 원량(元良) 의 딸 원홍장(元洪莊, 일명 :원희<元姬>) 이, 그녀의 눈 먼 아버지를 지극 정성껏 모시는 효심이,널리 중국에까지도 알려져, 서기 301년, 당시, 중국 최고의 국제적인 철광석 교역 거상이며, 중국 서진의 제후 이자 회계국의 왕이었던 '심국공 (沈國公)' 의 부하에 의하여, 중국 회계국의 도읍지인 '심가촌 (沈家村)' 으로 건너가, '심국공 (沈國公)' 의 양녀 (공주) 가 되었고, 양부 '심국공 (沈國公)' 의 성을 따, 성명을 '심청 (沈淸)'으로 고쳤으 며, 서기 312년에, '심국공 (沈國公)' 의 추천에 의하여,서진의 천자 혜제의 황 후가 된다는 기록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진서 열전 후비전에서는, 이 기록에 이어서, 중국의 황제 혜제가 서거 하자, 황후 '심청 (沈淸)' 은, 다시, 고국인 회계국의 수도 '심가촌 (沈家村)' 으 로 돌아와, '심가문 (沈家門)' 섬 근처의 보타도 보타산에 위치한'수정궁' 에서, 여생을 마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당시, '심가촌 (沈家村)' 은 중국 최 대의 국제 교역항이었고, 보타산은 중국

의 4대 불교 성지였다. 우리나라의'심청전 (沈淸傳)' 에서도, '심청 (沈淸)' 이 '용왕 (龍王)' 에 의하여, 중국 황제의 황후가 된다.

 

그리고, 중국의 정사 진(晉)서 열전 후비전과 우리나라의 '관음사 사적기' 모두, '심청沈淸)' 이 서진의제후 '심국공 (沈國公)' 에 의하여, 서진의 황제 혜제의 황후가 된다고기록 하고있다. 

 여기에서, '심청전 (沈淸傳)' 에서의 '용왕(龍王)' 이 바로,서진의 제후 회계국왕 '심국공 (沈國公)' 이라는사실을 쉽게 알 수있다.

 

참고로, '심청전 (沈淸傳)' 에서, 회계국왕 '심국공 (沈國公)' 은, '용왕 (龍王)', '사해 용왕 (四海 龍王)','사해 군주 (四海 君主)' 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위의 중국 진서와 우리나라 의 관음사 사적기와는 달리, 중국 절강성의 영파 (닝보) 시지에는, 원홍장을 '성비 (聖妃)' 로 표현하고, 절강성에 '성비궁터' 가 남아있 다고 기록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원홍장(元洪莊)' 과 '성비 (聖妃)' 는, '심청 (沈淸)' 을 말하는 것이고, '성비 궁터' 는,심청이 남편인 혜제가 서거하자, 다시 심가촌으로돌아와 여생을 보낸, '수정궁'  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파 시지에서, 황후 '심청 (沈淸)' 을, 왕비의 호칭인 '성비 (聖妃)' 로 표현한 것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심청 (沈淸)' 이, 남편인 중국 서진의 천자 혜제가 서거하자, 다시, 고향 인'심가촌 (沈家村)' 으로 돌아와, 양부 회계 국왕 '심국공 (沈國公)'과 또 혼인하여, 회계국 의 왕비도 되었음을 짐작해 볼수 있다.

 

중국 절강성과 '심가촌 (沈家村)' 에서도, '심청 (沈淸)' 과 '심국공(沈國公)'의 혼인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위의 자료들을 모두 종합해 보았을 때, '심청 (沈淸)' 은 중국의 황제와도 혼인하고, 양부인 회계국왕 '심국공 (沈國公)' 과도 혼인 했었다는 사실을알수 있다.즉,'심청 (沈淸)' 은, 중국 서진의 황후 이자, 중국 서진의 제후국인 회계국의 공주인 동시에, 왕비이기도 하였던 것 이다.

 

그리고, 당연히, 서진의 천자(天子) 혜제는, 서진의 제후 회계국왕 '심 국공 (沈國公)' 의 사위였다.

이렇듯, 중국에서, '심(沈)' 씨들은 왕(王)급이었고, 그 위상은 최고였다는 사 실을 잘 알 수 있다.

 

화제를 바꾸어, '심청전 (沈淸傳)' 에는, 임당수에 빠진 '심청 (沈淸)' 이, 용왕 (龍王) 에 의하여 구출되어, '연꽃' 을 통하여, 황후로 환생한다는 대목이 있다.

 

우연치 않게도, '심청 (沈淸)' 의 양부이자 남편인 '심국공 (沈國公)' 이 다스리 는 회계국 에는, 중국의 4대불교 성지인 '보타산' 이 있었고, '중국 서진' 과 심 국공 (沈國公)의 '회계 국',심청 (沈淸) 의 '백제' 모두, 불교 국가였다.

 

그리고 '연꽃' 은, 불교의 시조이자 세계4대 성인 중의 하나인 '부처' 가 태어난 곳으 로써, 불교에서는, '최고의 귀한 존재' 를 상징한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심청전 (沈淸傳)' 에서, '연꽃' 을 등장시킨 것은, '연꽃'을 통하여,  심청 (沈淸)이 '최고의 귀한 존재' 라는 사실을 표현하려고 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또, '관음사 사적기' 에는, 원홍장이 중국에서, 우리나라 백제 곡나(곡성)에 '관음성상'을 보내왔는데, 불상이 들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곡나(곡성)에 는 이 불상을 모시는 '관음 사' 가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중국 절강성 주산(舟山)시와 우리나라 전라남도 곡성군이, 공동으로, 한중 역사문화 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중국 절강성 주산시 보타구 심가문 (沈家門)' 이라는 항구 어 촌섬에, 1만 2천 여평에 달하는 대규모의 '심청원(沈淸園)'을 건립한다고 한다.

 

'심청원 (沈淸園)' 에는, '심국공 (沈國公)' 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서진 (晉) 양식으로, '심청 (沈淸)' 은, 우리나라 삼국 시대의 백제 양식으로, 4세 기 당시, 각각 중국회계국의 왕, 중국의 황후이자 회계국의 왕비이자 공주였 던 '심국공 (沈國公)' 과 '심청(沈淸)' 의 궁 궐과 사당, 제실, 묘비석, 묘역 등 이 각각 복원된다고 한다.

 

'심가문 (沈家門)' 이라는 항구는, '심가문진' 이라고도 불리는데, 중국의 최대 어항으로, 세계의 4대 어항이기도 하다.

 

'심가문 (沈家門)' 이라는 지명은, '심가문 (沈家門)'섬을 비롯한, 주산 군도일대가 '심 (沈)'  씨들의 장원(莊園, 영지)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심가문 (沈家門)' 섬을 '심가장 (沈家莊)'이라고도 부른다. '심가장 (沈家莊)' 은, '심가문 (沈家門) 섬을 비롯한, 주산 군도 일대가, 심씨들의세거지' 라는 뜻이다.

 

주산군도 일대 는, 고대 춘추 전국 시대서부터,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약 2500 여년간, '심 (沈)' 씨들의 세력권이었다.

 

중국 역사서에도 중국 한나라 시대에, 중국 절강 성 '심가문 (沈家門)' 과 우리나라의 마한과 변한이 서로 해상 교역을 한 기록 이 있다.

 

이를 증명해 주듯이, '심가문 (沈家門)' 에는, '심가촌 (沈家村)' 이라는 '심(沈)' 씨들의 집 성촌이 있다.

 

원홍장의 양부이자 남편인 '심국공 (沈國公)' 은, 중국 서진(晉)의 제후국인 '회계국의 왕' 이었는데, '회계국' 은, 중국 절강성 주산 (舟山) 군도 일원에 세워진 나라로,서진의 제후  '심국공 (沈國公)' 역시, 중국 절강성 태생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심씨는, 서진의 왕 '심국공 (沈國公)' 과 같은 혈족인 중국 절강성 심씨 의 일부가, 12세기 고려 중엽, 즉, 1100년대에, 중국 북송이, 북쪽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에게 멸망당하여, 수도를 절강성 항주로 옮기려 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중국 절강성 지역 에서, 상선을 타고, 고려로 귀화해 온 것이다.

 

그 증거로,우리나라의 '풍산 심씨 (豊山 沈氏)' 는,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 손이고, '심(沈)' 나라의 왕족이며,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대부였었던 심융의 후손인, 시 조 '심만승 (沈滿升)' 이,중국 북송이 금나라에게 멸망당하려고 하자, 1110년 (예종 5년)에, 중국 절강성 오 흥 지역에서, 상선을 타고, 고려로 귀화하여,강원도 풍산현 (지금의 강원도 화 천군 화천읍 풍산리) 에 정착했다고 한다.

 

고려에 정착한 심만승 (沈滿升) 은, 문장과 행의로써,국가 문치 발전에 크게 기여하여,현 요직에 등용되었고, 문장과덕행이 뛰어나, 예종의 총애를 받아, 청환직에 발탁되어, 상서 봉어를 거쳐, 1114년 (예종 9년) 에, 태자첨사부 첨사 (고려조에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정3품 벼슬) 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심만승 (沈滿升) 의 후손들은, 강원도 화천군 풍산(豊山)에서 세거하면서, 그 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풍산으로 하여,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청송 심씨 (靑松 沈氏)' 도,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심동제 (沈東 濟) 선생의 고첩' 에, 중국에서,'심공좌 (沈公佐,일명 : 심현좌 <沈賢佐>)' 가, 자신의 아버지인 '심충 (沈忠) ', 아들인 '심수정 (沈守貞)' 과 함께, 고려로 귀화했으며, 시조 '심홍부 (沈洪孚)' 는, '심수 정 (沈守貞)'의 아들이라고 기록되 어 있다.

 

 이는 '원류보 (源流譜)' 에도 기록되어있다.

 

참고로, 중국인들은 '심가문 (沈家門)' 을, '션자먼' 이라고 발음한다. 중국에 서는, '심(沈)' 씨가, '시엔', '셴', '센', '시언', '션', '선' 으로 발음되기 때문 이다.

 

 '심천 (深玔)' 을 '셴젠' 또는 '선전' 이라고 발음하거나, '심양 (沈陽 또 는審陽)' 을'셴양' 또는 '선양'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3대상신가문


시조:심홍부(문림랑공) - 심연(합문지후공) -심용(청화부원공) -

(심덕부 - 심온 - 심회 문중)

 

청송심씨,700년 명가의 창업주 심덕부

 

생졸년; 1328년-1401년. 자는 득지, 호는 노당. 첫 벼슬로, 2군 6위의 하나인 좌우위의 녹사가 되어, 국왕의 행차 때,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거나 외국 사신의 송별, 영접 때 경호 업무 등을 봤다.


1364년 수원부의 수령이 되고, 중서문하성의 정3품 우산기상시를 거쳐, 예의사의 우두머리 관직인 예의판서가 되었다. 그뒤 강계도만호, 의주부원수, 서해도원수를 지냈다.


1378년[우왕4]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최고 정무기관인 문하부의 종2품 관직인 지문하부사가 되어, 서해도원수를 겸하여 자주 출몰하는 왜구의 토벌에 앞장 섰다.


오늘날 로켓 무기의 일종인 화포를 고려말에 최무선이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화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초석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 고심하던 최무선은, 드디어,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원나라 사람 이원으로부터 초석 제조방법을 간난신고 끝에 알아내서, 이 화약을 이용한 18가지 화기를 만들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김정일이 핵무기를 만들어 내는 성과에 버금가는 개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380년[우왕6], 500여 척의 대선단을 거느린 왜구가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금강 하구로 겁없이 쳐들어 왔다. 이 왜구는 상륙하자 마자 가옥을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심지어, 두서너 살짜리 아기를 잡아 배를 갈라 씻어낸 뒤, 쌀을 집어 넣어 제단에 올리고 술을 부어 하늘에 고하기까지 했다. 왜구가 지나는 곳은 시체가 가을걷이한 논밭의 농작물처럼 쌓이고, 마을의 웅덩이나 어구의 실개울은 선지피로 붉게 물들었다.

 

왜구 침입 소식을 접한 도원수 심덕부, 해도 원수 나세와 함께, 최무선이 제조한 각종 화약 무기를 최초로, 실전에 사용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 당시, 신예 무기인 각종 화포를 탑재한 1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나가, 왜구의 본진이 주둔하는 500여 척 함선에 일제히, 화포를 퍼부어 적선들을 불태웠다. 노략질을 하던 왜구의 패거리들은 혼비백산해서 옥주, 영천 등지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들이 노략질한 쌀이 강원도 산간의 초가를 뒤덮은 폭설 만큼이나 쌓여 있었고 그 때 붉게 물든 실개울의 선혈이 6,7일이 지나도, 붉었다고 한다.


1385년, 문하 찬성사 겸 동북면 상원수로써, 북청에 침략한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같은 해에,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우왕이 최영의 말을 따라 요동정벌의 명을 내렸다. 최영을 8도 도통사에, 창성부원군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에,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에 임명했다. 이 때, 심덕부, 서경도원수로, 조민수와 함께, 좌군에 속했다.


좌,우군의 병력이 4만에 가까웠고, 말이 2만필이 넘었다. 1388년 4월 18일, 서경을 출발하여, 의주의 압록강 근처 위화도에 이르렀다. 우왕이 최영만은 붙잡고 못 가게 하였다.


요동 정벌군은 장마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는데, 떠내려 가는 군졸이 부지기수였으며, 군량미 소모가 너무 컸다. 이미 요동정벌 4불가론을 밝혔던 이성계는, 마침내, 조민수,
심덕부 등 제장과 협의하여 회군을 단행했다.


회군한 이성계는, 숭인문 밖에 진을 치고 회의를 열었다. 이 때, 참석했던
심덕부 이화, 조인벽 등과 함께, 궁궐로 들어가, 병장, 안마 등을 거둬 나오면서 우왕의 제2비이며 최영의 딸인 영비를 내줄 것을 왕에게 요구했다.

 

그뒤,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운 지 9년만에, 심덕부 조준, 박위, 정도전, 정몽주, 설장수 등과 함께, 이성계를 도와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우는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중흥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391년, 왕세자가 하정사로 명나라에 가기로 하였다. 그간 국왕을 폐위하고 옹립한 문제에 대해, 명나라의 반응이 나올 수 있는 미묘한 시기이므로, 왕세자를 수행하는 사절단의 인선에, 고려 조정의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이 사절단의 총책임자로, 문하시중
심덕부가, 전격적으로, 뽑혔으며, 문하 찬성사 설장수, 밀직부사 민개 등이 함께, 수행했다. 사절단 일행이 6개월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 왔을 때, 공양왕과 이성계에 의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392년 7월, 개경 수창궁에서 이성계가 즉위식을 올렸다.

이 때, 심덕부 판문하부사로, 조선 개국을 맞았으며, 1393년, 회군 공신1등이 되고 청성백에 봉해졌다. 이미, 지난해부터, 수도를 개경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들이 있어오다가 1393년 태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계룡산을 살펴 본 뒤, 권중화 등의 제의를 받아들여 공주 계룡산으로 천도를 서둘러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경기좌우도 관찰사 하륜이 계룡산은 새 도읍지로 옳지 않다고 상소했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1393년 12월에,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천도에 관해 성명을 발표했다.

 

" 과인은 깊이 생각해 본 결과, 계룡산 천도를 백지화하기로 하였소. 한 나라의 도읍은, 그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일이요.

계룡산은 강이 없고 남쪽으로 치우쳐, 교통마져 불편하여 적지가 아니오. 그래서, 오늘, 신도읍지 역사를 즉각, 중지하도록 명하였소" 계룡산 천도를 주장하던 진보파 세력과 충청도 천도를 반대하는 수구 골동파에 해당하는 양대 세력이, 오늘날과 같이, 팽팽하게 맞서 있을 때 나온, 임금의 성명은, 헌법 재판소의 결정과 같은 성명이었다.


두 세력의 갈등을 안타갑게 지켜보던 오늘날의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중도 완충 세력을 자임하는
심덕부가 자기 견해를 밝혔다. "전하, 참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조선의 중심지를 벗어나 외진 충청도로 도읍을 정한 뒤, 인천을 비롯한 경기도 도민들이 전전 긍긍하며 충청도와 경기도 간의 대립을 불러오려던 판에 내리신 용단이라, 8도의 백성들이 쌍수로 환영할 것입니다. 이제, 새 도읍지는 천만년 흥성지기의 곳을 물색하시기 바랍니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청성백께서는 마치, 좋은 도읍지를 알고 계신 듯 말하는 것 같구료. 어디로 새 도읍을 하는 것이 좋을지 한 번 말해 보구료."

 

중국 진나라 때부터,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해서, 사회 현상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일이 비롯되어, 후한 때, 아주 성행했다. 우리 나라도 고려시대에 이런 예언이 유행했다.

 

고려 건국을 정확히 예언하여, 그대로 맞아 떨어져, 신승으로 알려진 도선의 비기가 천변지이가 있을 때마다, 늘 화제가 되었다.

 

청성백 심덕부, "전하! [도선 비기]에 의하면 `왕씨를 대신할 자는 이씨이니 한양에 도읍할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목자씨가 임금되네, 한양 땅에 새 나라를 세우네.`라는 동요가 민가에 널리 퍼졌습니다.

그래서, 고려 조정에서 한양에 오얏나무를 심어 크게 자라면, 잘라내어 그 기운을 억눌러 왔습니다.

 

소신은 이 나라 도읍지야 말로 한양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고 아뢰었다.


이에, 정도전, 무학대사의 견해를 대폭 수용하여,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신도궁궐조성도감을 한양에 설치했다.

 

심덕부, 그 조성도감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하는 일을 총괄하였으며, 이어, 도성 축조도감도 설치되어 11만이 넘는 장정이 동원된 신도 건설 대역사에 크게 공헌했다.

 

1397년 판문하부사,1398년 영삼사사, 1399년 좌정승을 지내고, 그 이듬 해, 73세로 치사했다. 처음 시호는 공정이며, 나중에 정안으로 고쳤다.

 

청성백 심덕부, 태조 이성계가 가장 믿고 중히 여기는 인물로, 신왕조 건설에 크게 한몫 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 일곱을 낳아 다섯째 아들[온]이 세종의 장인이 되게 하고, 여섯째 아들[종]이 태조의 부마가 되게 하여, 조선조의 "삼한갑족 제1호"로 향후 700년을 한결같이 쇠하지 않는 명문 거족으로 탄생시켰다.

 

흔히들, 조선조 명문을 논하는 자리에서, 청송 심씨가 단골 메뉴로 손꼽히는 이유는, 심덕부 시작한 3대 상신 배출 덕분이다.

 

심덕부에서, 심온, 심회 이르는 [3대 연속 상신]은, 조선조에서, 딱, 세 번만이 있었을 뿐이다. 청송 심씨 노당 심덕부 문중의 심덕부, 심온, 심회 내려오는 3대 상신, 대구 서씨 약봉 서성 문중의 서종태, 서명균, 서지수로 내려오는 3대 상신, 청풍 김씨 관복재 김구 문중의 김구, 김재로, 김치인에 이르는 3대 상신이 바로 그것이다.

 

3대 상신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3대 대제학은, 부자 문묘 앞에서는 큰 소리를 못치는 것이,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이다. 부자 문묘 배향은 아무도 도전을 할 수 없는 조선 사회의 영원한 영광이다.

 

그 당시, 광산김씨 부자 문묘 배향을 중세기 로마 카톨릭 전성기에 비유한다면, 부자 교황을 낸 영광보다 그것을 더 대단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예의 일종일 뿐이고, 조선의 3대 상신은, 그 당시, 그 사회에서는, 모든 문중을 대표하는 영광이었다.

 

그런데, 청송심씨는, 이 세 집의 영광 중에서도, 혼자, 노른자위를 차지했다.

 

다른 두 집은, 3대 상신이라도, 3대가 다 수상이 아니고, 부수상이 한 명씩 끼여 있기 때문이다.

약봉 집은, 서명균이 좌의정이고, 관복재 집은, 관복재 김구 자신이 우의정에 머물렀다.

 

오직, 청송심씨만이 3대 수상을 낸 것이다. 이것은, 심씨가, 조선조 "삼한갑족 제1호"라는 긍지를 가질만한 것으로, 조선조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며, 조선 보학사에 영원히 남는 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심연원 문중)


청송심씨 700년 명가의 중흥조, 비운의 심온

 

심온 문하 좌정승 청성백 심덕부의 아들이다. 자는 중옥. 고려조에서 문과하여, 조선조가 개국한 이후, 간관으로 일했다.

1408년, 그의 딸이 충녕군의 비가 되었고, 1411년, 풍해도 관찰사로 나가 군기를 확립했다.

 

1414년, 형조판서에 이어, 호조, 이조, 공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어서, 세종으로 즉위하자, 국구가 되어, 청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다.


심온, 신임 영의정으로 예궐하여, 국모 중전 심비를 알현하였다. "신, 청천부원군 심온, 영의정 벼슬을 받아 사은 숙배드립니다." 44세의 영의정 심온, 24세의 딸 소헌왕후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날 저녁, 경연의 자리에서, 임금(세종)이, "명나라에 사은사를 보내라는 아버님(상왕 태종)의 분부가 계셨는데, 누가 적합하겠소?" 라고 물었다. 성석린이, "지금까지의 관례로 보아, 국구인 신임 영의정 심온 대감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모든 대신들도, 그것이 합당하다고 하여, 영의정 심온으로, 전격, 결정하였다.


이 때, 병조참판 강상인이, "상왕 전하가 계시는 수강궁 경호를 위해, 금군을 두 무리로 나누어야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것은, 상왕을 위하는 일이라 모두가 당연한 일로써, 대수럽지 않게 여기며,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새 임금(세종)을 추종하는 신진 세력을 은근히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상왕 태종을 따르는 구세력이었다.

 

이들은 상왕에게, "상왕 전하, 금위영 군사들이 수강궁을 경호하러 왔습니다." 라고 일러바치자, 상왕은, "군사권은 내가 쥐고 있는데, 누구 맘대로 금군을 움직인단 말이냐? 경호 한답시고 나를 연금시키자는 수작이냐?" 라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은 강상인과 심정(심온 막내 동생)이 앞장서서 부자지간을 이간시켜 군사권을 빼앗으려는 계략을 쓰는 듯하다고 모함했다.


병조에서, 상왕을 속인 이들 무리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수강궁 마당에 친국청을 차리고, 그들을 문초하였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임금 자리를 세종에게 물려주고도, 군권만은 자신이 쥐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신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이들 무리들을 엄벌하려다가, 대비 등의 간곡한 만류도 있고, 또, 아들 세종의 체면도 고려하여, 강상인과 박습만을 이 사건의 주모자로 하여 멀리 귀양보내는 선에서, 일단, 이 사건을 매듭 지었다.


그 사건이 끝난 후, 심온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 거리는 온통,
심온 일행의 송별 인파로 뒤덮였다. 임금의 장인에다가 영의정을 겸했으니, 그 위세가 당당하기 그지 없었고, 요란한 행차가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다.


상왕은, 전송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거마의 행렬이 거리를 메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씁쓸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차에, 좌의정 박은과 병조좌랑 안헌오가 상왕을 찾아 뵈웠다.

 

오래전부터, 영의정 심온 막내 동생인 의흥삼군부 총제 심정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안헌오가 입을 열었다. "마마, 군사에 대한 명령이 한 곳에서 나오지 않고 두 곳에서 나오니 온당치 않다고 강상인, 심정이 박습과 함께 말하는 것을 들었나이다." 라고 고자질했다. 이 소리에 상왕은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또 이르기를, "심온 영의정에 임명될 때, 영의정보다는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좌의정을 더 되고 싶어 했나이다." 이 말을 들은 상왕은, 심온 형제가, 척신임을 기화로, 세력을 잡을까 두려워했다.

 

상왕은, 의금부에 명하여, 강상인, 박습, 심정을 잡아 들였다.

이들은 심문이 시작되자, 무릎뼈가 으깨어지는 압슬형을 여러 차례 받았다.

이 무서운 고문에 못 이겨, 강상인과 박습은, 태종과 심복들이 유도하는 대로, 허위 자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린, 전 이조참판 이관을 잡아왔다. 그는 단지, 심온 친한 죄로 잡혀 온 것이다.

 

"심온 형제가 군사에 대한 명령이 두 곳에서 나와서는 안된다고 하였던가? 이실직고하라." 며, 심한 고문을 가하자, 이관 역시, 살려 달라며, 허위 자백했다. 상왕을 따르는 무리들은, 이 사건을 역모로 모는데 성공했다. "이 역모를 주도한 것은 심온의 짓입니다.

 

권력을 한 손에 쥐려는 모반 행위이오니, 심온 소환하여, 처형하심이 가할 줄 압니다." 고 역설했다.

그들은, 심온 돌아오면, 그 계략이 탄로날까봐 심온 돌아오기 전에, 강상인, 심정, 박습의 처형을 서둘렀다.

 

외척이 세도 부리는 것을 가장 경계하는 상왕의 노파심과 신흥 세력을 몰아내려는 박은 일파의 합작품이, 마침내, 결실을 보아, 이들을 처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강상인은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조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지에 밧줄을 매달고,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묶어, 극형에 처했다. 심정과 박습은 목을 쳐서 죽였다.


서울을 떠난지, 두 달이 가까워 오는 어느날,
심온 일행은 임무를 마치고 우리 나라 제일 북쪽인 안동 땅에 이르렀다.

 

이들이 막 강을 건너려고 나룻배에 타려는데, 한 여인이 길을 막았다. 중전(심온 딸)을 모시고 있었던 강상궁이었다.

 

강상궁은 변장을 하고, 영상 심온 살려내기 위해, 자진해서 의주로 달려온 것이었다.

 

고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알리고, 상왕이 오해가 풀릴 때까지, 명나라로 돌아가 피신해 있기를 권하였다. "이대로 강을 건너시면, 왕명을 받은 의금부 금군에게 체포될 것입니다.

어서 피하십시요." 이 말을 들은 심온, "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말이요. 강상궁의 말은 고맙기는 하나, 신하의 목숨은 전적으로, 임금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임금의 뜻을 거역한단 말이오?" 라며, 완강히, 강상궁의 권유를 뿌리치고, 배를 젓게 하여 의주로 향했다.

 

강상궁은 심온 일행을 눈물로 하직하고, 그 배가 멀어져 형체가 보이지 않자, 고국을 향해 절을 올리고 강물에 뛰어 들어, 압록강의 가엾은 영혼이 되었다.

 

심온 일행이 탄 배가 의주에 닿자마자, 의금부 진무 이욱이 거느리는 금군들이, 배안에 뛰어 들었다. "어명이요. 역모를 한 대역죄인 심온 오라를 받으시요." 라고 외치며, 현장에서 심온을 체포했다.


심온 도성(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심한 국문을 받은 뒤, 수원으로 귀양을 갔다.

 

상왕은, 심온이 왕비의 아버지이니, 심온으로 하여금, 자진해서 목숨을 끊으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것은 말이 자진이지, 사실은, 사사나 마찬가지의 참혹한 처형이었다.


세종 즉위년인 1418년 12월 24일, 세종이 즉위한지 약 넉 달만에, 세종의 국구 청천부원군 영의정 안효공
심온, 이처럼 억울하게 죽었다.

 

뒤에, 태종과 박은의 무고로 밝혀져, 황희 정승 등의 적극적인 심온 대한 신원 상소가 있었지만, 세종 대에는 신원되지 못하다가, 세종 사후, 심온 외손자인 문종 대에 가서야, 완전히, 신원 복관작 되었으며, 안효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심온, 직계는 박은에 대한 천추의 한을 안았지만, 크게는 조선조 왕권 수호의 억울한 희생양이 되었다. 보통 이런 사건이 무고이든 사실이든 간에, 역모에 걸리면, 모든 가문이 몰락을 면치 못하는 것이 대세다. 그렇지만, 심온 앞뒤 사정이 남과 많이 달랐다.


첫째,
심온 아버지 심덕부, 태조 이성계의 딸 경선공주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고, 심온 본인은, 딸을 키워서 태조 이성계의 손자인 세종의 아내가 되게 했으니, 하나는 조선조의 창업주요, 또 하나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임금으로 추앙받는 성군이다.

 

전주 이씨 왕실의 위대한 두 영웅과 청송 심씨의 두 호걸이 겹사돈이 되었으니, 조선조 역사상, 왕실과 혼인하여, 이처럼 화려한집 을 어디서 또 찾아 볼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나 누리는 영광 중에, 이보다 더 큰 영광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둘째, 심온 생전과 사후 영광이, 조선 역대 최고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심온 아버지가, 오늘날의 수상인 고려조의 문하시중이요, 조선 개국을 맞아, 역시, 오늘날의 수상격인 문하 좌정승인 청성백 심덕부, 본인이, 세종 시대의 국구 겸 영의정으로, 살아서 누린 영광이 지극했다. 세종 즉위년의 심온 사사후, 약 30년 후에, 세종이 승하하고, 심온 외손자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종은, 자신의 외조부인 심온 완전히, 신원 복관작시켰고, 심온 옥사 이후, 30여년동안 은거하고 있었던, 심온 아들 심회 심결을 비롯한 청송 심문들이, 드디어,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심온 둘째 아들 심회 발복하여, 역시, 심온 외손자인 세조조에, 영의정에 올랐다. 이로써, 3대 연속 영의정(수상)이라는 조선 시대 전무후무한 진기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심회 형인 심준과 동생 심결이 모두, 정1품 영중추부사에까지 올랐으니, `3형제 정1품' 이라는 조선 시대 유일무이한 진기록도 탄생하게 되었다.

 

`3형제 정1품' 의 진기록을 세운, 심준, 심회, 심결은, 모두, 심온 세 아들이다.

 

세종 즉위년, 아버지 심온 옥사(1418년 12월 24일) 이후, 관군을 피해, 잠시, 곡산 강씨의 양자로 입적해, 은거하고 있었는데, 삼형제 중에서, 심온 장남인 심준은, 세종 말엽에, 세종의 처가에 대한 특별한 배려로, 음보로, 사헌부 감찰을 거쳐, 영중추원사(영중추부사, 정1품) 에까지 올랐었으나, 문종 1년(1451년), 심온 완전히 신원 복관작 되었을 때에는, 심준은, 이미, 일찍, 죽어있었고, 심회 심결만이, 척리(왕의 외척) 로써,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 심회, 세조의 외숙부로써, 세조 때, 판한성부사(한성부 판윤), 공조판서와 형조판서, 판의금부사, 우찬성과 좌찬성, 영중추원사, 좌의정을 거쳐, 세조 말년에, 영의정에 올랐고, 성종조에도, 원상을 지내고, 70세가 넘은 원로 대신으로써, 궤장을 하사받고, 좌의정과 영의정을, 다시 한번 지냈다.

 

또한, 예종과 성종 때에는, 각각 1번씩, 2등 공신에 책록되어, 청송부원군에도 봉해졌다.

심결도 역시, 세조의 외숙부로써, 세조 때에, 공조판서를 거쳐, 성종 초에,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일찍 죽었다. 그리고, 참고로, 조선 시대 역사상, 문과를 거치지 않고, 음보로, 영의정에까지 오른 사람은, 심회, 황수신 (황희 정승의 아들). 이렇게, 단, 둘 뿐이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음덕으로, 문과를 거치지 않고, 영의정에까지 오른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은, 심온 - 심회, 황희 - 황수신 의 부자 영의정의 기록도 세웠다.      


그리고, 영의정
심회 증손 심연원 명종조에, 또, 영의정에 오르니, 심연원 본인도 인물이려거니와 본인의 5대조 심온 음덕을 어찌, 입지 않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심연원 아들이 바로, 파조 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심강이다.

 

또한, 영의정 심연원 증손이고, 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심강 손자이며, 병조판서 심충겸의 아들인, 심열이 또, 영의정에 오르고, 그 밖에, 심수현, 심환지, 심순택이 영의정을 지내니, 명종 국구 심강 가문 직계에, 상신이 위로 4명, 아래로 4명이 나와, 도합 8명의 영의정이 배출된 셈이다. 그리고, 명종 대에, 윤원형, 이량과 함께, 최고의 척신이었던, 심연원 막내 동생 심통원도, 명종조에,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로써, 심연원 심통원의 형제 정승도 기록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렇게, 청송심씨
심강 직계 가문이, 영의정을 8명 냈고, 조선 말기의 외척 세도 가문인 안동김씨 김상헌 조부 김생해 가문이, 8명의 영의정을 서, 두 가문이 함께, 조선조 단일 가문으로는, 영의정 최다 배출 기록 공동 1위를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가문 전체로 보면, 청송 심씨가 안동 김씨보다 영의정을 2명 더 많이 배출해, 영의정 배출 부문은, 단연, 청송 심씨가 단독 1위다. 또한, 영의정과 좌의정을 합친 배출 수에서도, 청송 심씨가 단독 1위이며, 종2품 (참판, 관찰사, 유수, 대사헌,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 한성부의 좌윤과 우윤, 오위도총부 부총관, 부윤, 동지사, 종2품의 제조, 오위장, 좌,우 포도대장, 통제사, 도원수, 유도대장, 수성대장, `장신' 이라고 불리는, 훈련대장, 어영대장, 금위대장, 수어대장, 총융사, 장용대장 등) 과 정3품 당상 (참의, 병조참지, 승지, 도정, 판결사, 첨지사, 경연참찬관, 수찬관,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 부제조, 규장각 직제학, 내금위장 등) 의 배출 수도, 단독 1위이다.  


여하튼, 청송심씨
심강 직계 가문은, 이렇게, 상신이 되었다하면, 모두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우의정으로 끝난 사람도 없었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으로 끝낸 사람도 없었다. 중도에 그친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상신에 올랐다하면, 하나같이, 모두가 다 정상에까지 올랐다. 이것이 이 가문의 특징인 것이다.

 

이것은 영의정에 오르자마자, 그 영광을 채 누리기도 전에, 억울하게 죽은, 선조 심온 영혼을 달래려는 후손들의 지극한 정성과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찌 심온이 죽었다 하랴!
심온 살아서 자손에게 내릴 음덕보다, 죽어서 내린 음덕이 더 큰 데에, 그 선조로서의 심온 걸출함이 있는 것이다.


심온은 약 600년 전에, 40대 중반을 채 못 넘긴 나이로, 처절하게 죽었지만, 심씨 가문의 위대한 중흥조로 다시 부활하여, 그 후손들의 가슴속 에 지금도 뜨겁게 살아 있다.!!

(심의겸문중)

청송심씨 하늘이 도왔는가, 인물이 잘 났는가?


한양사류의 영수 심의겸

 

심의겸 1535년[중종30]에 태어나 1587년[선조20]에 졸했다.

자는 방숙, 호는 손암, 간암, 황재이다.

문하 좌정승 청성백 정안공 심덕부의 7대손이고, 세종의 국구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 6대손이며, 영의정 청송부원군 공숙공 심회 5대손이고, 영의정 청천부원군 충혜공 명종 묘정 배향 심연원 손자이며, 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 익효공 심강 둘째 아들이다.

 

그리고, 5대조 영의정 청송부원군 공숙공 심회 둘째 아들 이조참의 한성부 좌윤 청천군 이경공 심한의 증손이며 중종 반정 정국 2등 공신 한성부 좌윤 오위도총부 부총관 겸 지훈련원사 청성군 호양공 심순경의 손자인 사헌부 감찰 심홍이 무후하여, 심홍의 양자로 입양계대하였다.

심의겸은, 또한, 명종의 정비 인순왕후의 동생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교리, 검상을 지냈다.

 

그는 의정부 정4품 관직인 사인으로 일할 때, 공무로, 윤원형의 집에 들렀다.

세도가 원형의 집에서, 김효원이 식객 노릇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그때, 김효원은 이미, 문장에 뛰어나, 그 이름이 꽤 알려져 있었다.

 

심의겸 그가 세도가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아주 곱지 않은 눈으로 봤다. 그런 효원이 장원 급제를 하자, 심의겸은 효원에 대해, [세도가 윤원형 집에서 자란 사람] 이라 하였다.


심의겸 1572년, 이조참의로 있을 때,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권신에 아부했다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1574년, 결국,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오르고, 영남 출신의 사류가 대거 진출하여, 김효원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1년 후, 김효원이 이조정랑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번에는, 이조참의에서 대사헌으로 승진해 있었던 청양군 심의겸의 동생인, 예조좌랑 심충겸 (인순왕후의 동생, 문과 장원 급제, 나중에,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에까지 올랐다가 요절함.) 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었으나, 김효원이 [이조정랑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일 수 없다.] 라고 반대하여, 결국, 심충겸은 이조정랑에 앉지 못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양의 선배 사류는, 심의겸 중히 하였고, 연소한 남도 출신 사류는, 김효원을 받들었다.

 

대사간 허엽은 나이는 심의겸 가까웠으나, 김효원에게 사간 (종3품의 사간원의 관직) 을 시켜, 연소한 사류의 종주가 되었고, 중앙 원로측 박순을 비롯한 정철, 신응시 등은 심의겸 옹호했다.

 

오늘날 보수 원로 세력과 386 신진 세력 간 힘겨루기 양상의 표본인 셈이다.

 

심의겸 일파인, 김계휘를 평안감사로 내보내고, 이조참판 유희춘을 사직시켜 고향으로 내보

냈으며, 이후백을 함경감사로 내보냈다.

 

이것은, 허엽의 아들 허봉이,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참판 박근원과 모의해서, 취한 조치로, 김효원 일당의 책략이라고, 심의겸 일파에게, 비난을 받은 사건들이었다.


율곡 이이는, 붕당을 우려하여, 우의정 노수신에게, [조정이 시끄러우니 그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내면 다소 진정될 것이라.] 고 제의했다. 노수신은 섣불리 그랬다가 조정이 더 시끄러워질 수 있다며, 신중론을 폈다.

 

이 때, 대사간 정지연이, 이이의 말을 쫓아서, 참판 박근원, 좌랑 이성중과 허봉 등 김효원 일당을 이조에서 일시에 몰아내 버렸다.

 

이로써, 심의겸 세력이 갑자기 커져서, 그 기세가 도도해졌다.

이에 놀란 우의정 노수신은, 이이의 지난 말을 들어, 김효원을 삼척부사(종3품)에, 심의겸

개성부 유수(종2품)로 내보내게 하였다.


이 때부터, 경서[정릉방]에 집이 있는 심의겸의 원로 사류를 서인, 경동[건천동]에 집이 있는 김효원의 후배 사류를 동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이, 성혼의 친구나 문인은 거의 서인 계열이었고, 이황, 조식의 문인은 거의 동인 계열이었다.


서인 측 윤현과 동인 측 김성일이 함께 일하며, 서로, 의견이 대립했다.

 

윤현은 그의 숙부[두수,근수]가 다 요직에 있으면서, 서인을 옹호했고, 동인을 배척헀다.

 

동인은 이 3윤[두수,근수, 현]을 논핵하며 좇아내려 했다. 정철이 서인 편을 들고, 이발이 동인 편을 들었다.


대사간 김계휘가 나서서, 3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후배 사류들이 들고 일어나, 김계휘를 논핵하여 전라감사로 내보내고, 김계휘 편을 든
심의겸 동생 심충겸도 쫓아냈다.

 

이이, 백인걸, 김우옹 등은 동,서를 타파하고, 사류를 규합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으며, 동서 분쟁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왕은 정2품 이상의 관원들을 선정전으로 불러놓고, 동서 분란의 책임을 물어,
심의겸 김효원을 처벌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처벌을 반대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동서 분당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

나, 그들이 고의적으로 양당 대립을 부추겨 악화일로를 걷게 한 원흉은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라도, 활과 활시위 역할을 하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며, 화살을 시위에

 얹어 당기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심의겸 활이요, 김효원이 시위라면, 활시위를 당긴 사람

이 너무나도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동,서 분쟁은 불특정 다수의 횡포다.


 

어쨌든, 그 일련의 사건으로, 나라로서는 국력의 소모가 컸고, 심씨 문중으로서는 큰 인물 하나를 잃어 버렸다.

 

심의겸 동서 분당의 희생양이었다. 동,서 분쟁이 격화되지만 않았다면, 그는 마땅히, 조정의

 영수로써, 큰 역할을 하고도 남았을 인물이었다.

 

그 보잘것 없는 사건을, 동서 분당으로, 확대 해석하는 바람에, 심의겸 그 문중 후손들만 가장

큰 해를 입었다.

 

심의겸 매우 빼어난 인물이었다. 1-200년에, 큰 인물을 하나씩 내는 심씨 문중에, 점지된 인

물이 바로, 심의겸이었다.

 

한양 사류의 핵심 세력을 이끄는 영도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로, 세력이 있어야 하고,

두 번째로, 학문이 있어야 하며,

세 번째로, 덕망이 있어야 한다.

심의겸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다 갖춘 큰 재목이었다.

 

그는 소장파 시절부터, 중앙 사류의 명망을 얻어, 차차, 그 세력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여, 은연 중에, 그들의 영수가 되었던 것이다.


 

심의겸과 외숙 이량

 

심의겸 더 잘 이해하려면, 그의 외삼촌 이량과의 관계를 알아볼 만하다.

이량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세종의 형)의 5대손으로, 1519년에 태어나, 1552년 문과하여, 도승지를 지내고, 공조, 이조, 예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이량의 후손에, 6명의 판서를 냈고, 현대에 와서는,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 이기붕을 냈다.

이기붕의 집안은,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같은 전주 이씨 양녕대군(세종과 효령대군의 형)의 후손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양자로 준 집이기도 하다.

 

이량은 심강 딸, 즉, 명종의 정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삼촌이다.

 

심의겸 인순왕후의 동생이니, 이량은, 심의겸 외삼촌이기도 하다.

 

이 때, 대비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조정의 기강을 흐려 놓고 있었다.

 

명종은 조정의 혁신을 위해, 윤원형에 대항할만한 인물을 물색하다가, 중전의 외삼촌을 가까이 했다.


임금은 이량을 동부승지로 삼아, 무슨 일이든 그와 상의하였다. 이 소문이 나자, 그의 옆에, 이감, 이영, 권신, 김백균, 김명륜 등이 몰려 들어 세를 이루었다.

 

또한, 자기 아버지 윤원로를 죽인 윤원형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는 윤백원[윤원로의 아들, 윤원형의 조카, 김안로 손녀의 남편]도, 그 옆에 왔다.

 

이량은 임금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윤원형을 누르고야 말았다.


그러자, 이제는, 이량이 방자해졌다. 이감, 윤백원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키우면서, 정치를 농단했다.

 

축재를 하여, 대저택을 금은 보화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신진 사류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조판서 이량 밑에 있었던, 신진 사류인 이조정랑 박소립을 파직시키고, 이량의 아들을 좋은 자리로 옮겨 주라는 청을 거역한, 윤두수도 몰아냈다.

 

동부승지 허엽이 경연관으로, 임금 앞에서 이량에게 불리한 야기를 했다하여, 그도 몰아냈다.


이량이 이감, 윤백원, 이영, 권신 등 6간이라 불리는 심복들을 모아놓고, 사류를 해치려는 음모를 획책했다.

 

이 사실을 알아낸 심의겸은, 자신의 처가쪽으로 인척이 되는 부제학 기대항에게, 이 음모를 알렸으며, 누이인 중전과 아버지 청릉부원군 심강 힘을 빌려, 이량을 귀양 보내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이로써, 박순을 비롯한 많은 사류를 구제하여, 많은 칭송을 크게 들었다.

 

심강 아들 7형제 중에서, 심의겸만이 심씨 가문의 3대 상신인 심덕부. 심온, 심회와 심연원, 심강으로 이어지는 대인의 기풍을 가장 크게 받았다. 그가 없었으면, 조선 상반기에 떨치던 심씨 가문의 성세를 후반기에 잇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 후반기의 심연원 문중의 번성은, 오로지, 심의겸 덕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심강 맏집이며, 심의겸 형인 심인겸 후를, 자신의 아들 심엄으로 잇게 하였고, 심엄 장남심광세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 후손들이 조선 후반기에 매우, 번성하였다.

 

정승은, 영의정 3명과 대한제국 때의 참정 대신 1명을 배출하였고, 판서는, 13명을 배출하였다.

그 이외에도, 고위 관료와 대문장가, 대학자 등의 인물들을 수두룩하게 배출하였다.

 

즉, 심의겸 후손들이, 심씨가 벌였던 명문 잔치의 대미를 장식한 셈이다.


조선의 수많은 명문가들을 모두 통틀어, 이렇게, 조선 전체 기간동안, 명문으로, 성가를 올린 집안은, 몇 손가락안에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물다.

 

청송 심씨가 이렇게, 조선 전체 기간동안, 한결같이, 지속적으로, 명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심의겸 집안을 밑바탕으로 한, 여섯 차례의 아들 복 덕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심덕부가 일곱 아들을 낳아 조선 개국 초기를 휩쓸더니, 심온 세 아들을 낳아 세조조와 성종조를 주름잡았고, 심순문이 네 아들을 낳아 명종조를 집어삼켰으며, 심연원의 아들 심강 또다시, 일곱 아들을 낳아 명종조와 선조조를 울렸다.

 

또한, 심의겸 아들 심엄 여섯 아들을 낳아 인조조를 풍미했고, 심광세 또다시,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의 후손들이 조선 후반기를 풍성하게 장식했다. 이것이 어찌, 인력으로만 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로 본다면, 심씨 가문은 하늘이 도왔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청송 심씨가 전적으로, 하늘 덕에 명문이 되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그것은, 그 선조들이 남모르는 노력을 한 덕도 있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심온 심의겸 희생 덕이 매우 컸다.

 

전자는, 명나라로 피신하여, 구명도생할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목숨 기꺼이 받쳐, 왕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면서, 그의 고매한 선비로서의 충절과 기개를 만천하에 널리 떨쳤으며, 후자는, 한양 사류의 영수로써, 또한, 외척으로써, 독한 마음을 먹고 술책을 썼으면 조정의 영수도 가능했고, 외척 세도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들을 모두 뿌리치고, 자신의 희생을 달게 받아들였다.

 

심의겸, 그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근신하며, 외척의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세도를 부리는 자신의 외숙을 꺾어, 청류의 희생을 크게 막기도 하였다.

 

즉, 심온 심의겸. 이 두 사람의 희생이 없었던들, 오늘날에, 어찌, 심씨 문중이 이러한 명성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종손 상자각자(相恪,1888-1954)께서는, 독립운동을 하시었으며.이시영, 김구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신 애국선열로 그 공이 인정되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3대 상신가문의 (직계)역사적 내력

 

[정1품]


  파조의 아버지, 영의정


* 심연원 [영의정] ,<심홍부(시조 문림랑공) - 심연(합문지후공) -심용(청화부원공) -

심덕부(문하 좌정승) - 심온(영의정, 세종의 국구) - 심회(영의정, 사궤장) - 심원(내자시

 판관) - 심순문(의정부 사인, 사헌부 장령) -  - 심온(영의정, 세종의 국구) - 심회(영의정,

 사궤장) - 심원(내자시 판관) - 심순문(의정부 사인, 사헌부 장령) - 심연원 (영의정,

명종의 묘정에 종묘 배향됨.>


 

파조 심강 [명종 국구]의 아버지이다. 김안국의 문인으로, 1522년 문과하였으며, 152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였다. 1537년 동부승지, 1543년 한성부 판윤, 1545년 호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경학에 밝고 문장을 잘 했다. 정사

를 잘 돌보아 능력있는 영의정으로 명망이 있었다.


 

 파조 명종 국구

* 심강 [국구] <영의정 심연원의 아들>


154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음보로, 활인서 별좌로 있다가, 경원대군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종의 국구로써, 청릉부원군에 봉해지고,1548년에는, 정1품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563년, 이조판서로써, 세도를 부리던, 처남 이양이, 기대승, 허엽, 윤두수, 박순 등을

제거하려 했다. 이에, 심강과 그의 아들 심의겸이, 그들을 구출하고, 이양을 제거하여,

사림으로부터 많은 칭송을 들었다.

 

* 심열 [영의정] <심연원(영의정) - 심강(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 심충겸(명종의 처남, 동서 분당의 당사자, 병조판서) - 심열(명종의 외조카, 영의정)>


1593년 문과하여, 4도 관찰사를 지내고, 1623년 호조판서가 되었다. 국가 재정을 잘 보기

로 유명했다. 1638년 우의정, 1643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 심수현 [영의정] <심강(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 심의겸(서인의 초대 영수, 명종의

처남, 예조참판) - 심엄(명종의 외조카, 인조의 이모부, 과천현감) - 심광세(인조의

이종사촌, 홍문관 응교) - 심억(한성부 서윤) - 심약한(진사) - 심유(홍문관 응교,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 심수현(준소의 영수, 영의정)>


1704년 문과하여, 이태좌 등 16인과 함께, 홍문록에 올랐다. 1714년 양양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충청도 관찰사로 승진했다. 1722년 공조판서,1724년 병조판서 겸 금위대장 겸

판의금부사를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1733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1734년, 청나라에 가는

사은사에, 관상감원을 수행시켜, 달력만드는 신법을 연구해 오게 했다. 정사를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여, 훌륭한 영의정으로 평가 받았다.


* 심환지 [영의정]
<심강(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 심의겸(서인의 초대 영수,

명종의 처남, 예조참판) - 심엄(명종의 외조카, 인조의 이모부, 과천현감) - 심광세

(인조의 이종사촌, 홍문관 응교) - 심은(진사) - 심약명(현감) - 심속 - 심태현

(홍문관 교리) - 심진 - 심환지(노론 벽파의 영수, 영의정)


1771년 문과하여, 규장각 제학, 이조판서 등을 거쳐, 1798년, 우의정에 올랐다. 좌의정을 거쳐,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첨정을 하게 되자, 영의정이 되어, 원상으로써, 정권을 장악했다. 외척인 경주 김씨의 김구주와 같은 벽파로서, 신유사옥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했다.


* 심순택 [영의정]
<심강(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 심의겸(서인의 초대 영수,

명종의 처남, 예조참판) - 심엄(명종의 외조카, 인조의 이모부, 과천현감) - 심광세

(인조의 이종사촌, 홍문관 응교) - 심은(진사) - 심약명(현감) - 심속 - 심택현(이조판서,

 판돈녕부사) - 심구(군수) - 심풍지(예조판서) - 심능악(이조판서, 판돈녕부사, 입기로소)

 - 심의린(진사) - 심순택(영의정, 초대 의정대신, 사궤장, 입기로소)

 

1850년 문과하여,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 양관 제학 등을 지냈다. 그 뒤에, 예조, 형조,이조의 판서로 일했으며, 1884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사대당 내각이 들어설 때, 영의정에 올랐다. 이 때, 청,일 양국의 정치적, 외교적 압박으로부터, 수많은 고

난을 겪었다.

1897년 원상이 되고, 대한제국이 창건될 때, 초대 의정대신이 되었으며, 1902년, 대한제국

건국 1등공신에 책록되어, 대훈위가 되고,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경종 국구

 

* 심호 [추존 국구] <심강(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 심충겸(명종의 처남, 동서

분당의 당사자, 병조판서) - 심열(명종의 외조카, 영의정) - 심희세(인조의 이종사촌,

홍문관 교리) - 심권(명문장가, 승지, 예조참의, 전라도 관찰사) - 심봉서(의금부 도사)

 - 심호(경종의 추존 국구, 사옹원 첨정)


 

숙종 때, 숙종과 장희빈의 장남인 왕세자 경종의 장인이 되어, 음보로, 참봉을 거쳐,

 사옹원 첨정을 지냈으며, 일찍 요절하였는데, 사후에, 왕세자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경종의 국구로 추존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은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효숙이다.


 

[정2품]


1. 심충겸 :
명종 국구 심강(영돈녕부사) - 심충겸(명종의 처남, 병조판서, 증 대제학 겸

좌찬성, 호성 2등 공신, 청림군, 충익공) <중종 왕자 봉성군의 사위, 서인 최초의 영수인

대사헌 청양군 심의겸의 친남동생>


2. 심승택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오 - 심최현 - 심횡 -

 심종지 - 심능열 - 심의진(양양부사) - 심승택(예조판서, 입 기로소(정2품이상))

<대훈위이고, 의정부 참정 대신이며,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항의로, 자결 순국한,

충정공 민영환의 장인인, 이조참판 신안동 김명진의 장인)


3. 심상한 : 2번의 심승택의 양자, 심승택(예조판서) - 심상한(1906년에, 사직서 제조

(정2품), 칙임관 3등(정2품이상), 장례원 경(정2품), 입 기로소(정2품이상), 1909년에,

자헌대부(정2품 하계), 사직서 전사(정2품))

 

4. 심택현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이조판서, 판돈녕부사, 분무 원종 1등 공신, 청헌공)

 

5. 심수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계현

(담양부사) - 심수(이조판서)

 

6. 심이지 : 5번의 심수의 아들, 심수(이조판서) - 심이지(호조판서)

 

7. 심관지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이조판서) - 심규(해주목사) - 심관지(병조참판,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

 

8. 심풍지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이조판서) - 심구(영천군수) - 심풍지(예조판서, 정정공)


9. 심능악 : 8번의 심풍지의 아들, 심풍지(예조판서) - 심능악(이조판서, 판돈녕부사,

입 기로소(정2품이상)


10. 심능건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이조판서) - 심규(해주목사) - 심정지(삭녕군수) - 심능건(영조의 부마, 청성위, 1801년

에, 사은정사(정2품이상), 1805년에, 정2품의 종척집사, 1806년과 1808년에, 주청사 겸

동지정사(정2품이상))

 

11. 심의면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이조판서) - 심구(영천군수) - 심풍지(예조판서) - 심능달 - 심의면(형조판서)

 

12. 심이택 : 11번의 심의면의 양자, 심의면(형조판서) - 심이택(홍문관, 예문관 양관

제학, 이조판서)


13. 심의원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정세(군자감 판관) <선조 국구 김제남

의 사위> - 심진(정사 원종 공신, 군수, 수 동지중추부사) - 심약사 - 심윤(선공감역) -

심방현 - 심환 - 심위지 - 심능철(돈녕부 도정) - 심의원(공조판서, 입 기로소(정2품이상))


14. 심경택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이조판서) - 심구(영천군수) - 심건지(호조정랑) <순조 국구 김조순의 장인> - 심능적

(승문원 권지 부정자) <순조 국구 김조순의 처남, 순원왕후와 영의정 김좌근의 외숙부>-

심의복(호조참판) <순조 국구 김조순의 생질, 순원왕후와 영의정 김좌근의 고종 사촌>-

심경택(예조판서, 효정공)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예조참판 심상학의 친부이며,

순원왕후와 영의정 김좌근의 외당질>


15. 심응택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득현

(청풍부사) - 심둔 -심뇌지 - 심능목(진사) - 심의현(능주목사, 동지돈녕부사) - 심응택

(공조판서) <흥선대원군의 장인인 판돈녕부사 민치구의 사위, 흥선대원군의 처제부,

고종의 이모부>


16. 심상훈 : 15번의 심응택의 아들, 심응택(공조판서) - 심상훈(이조판서, 탁지부 대신,

군부 대신, 법부 대신, 1899년에, 용산 전환국 관리관, 조선 은행 설립 참여, 대한 천일

은행 설립 발기인 제1순위, 1904년에, 대한제국 중앙 은행 초대 총재, 서울역 건립 참여,

의정부 참정 대신, 충숙공) <대훈위이고, 의정부 참정 대신인 충정공 민영환과 병조판서

 민영익, 규장각 지후관이며, 칙임관 2등(종1품이상)인 민영찬의 외사촌이고, 이조판서

민겸호, 병조판서 민승호의 외조카이며, 흥선대원군과 자신의 아버지 공조판서 심응택의

 장인인, 판돈녕부사 민치구의 외손자, 흥선대원군의 외생질, 고종의 종모제, 순종의 외당숙>


17. 심상황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이조판서) - 심구(영천군수) - 심풍지(예조판서) - 심능악(이조판서) - 심의만(덕천군수) -

심기택(서부도사) - 심상황(비서승 겸 장례, 비서원경, 1906년에,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

3등(정2품이상), 1907년에, 자헌대부(정2품 하계), 규장각 제학(정2품 ~ 종1품))


18. 심의풍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총(정사 원종 공신, 광주부윤) -

심약기(진사) -심융(직산현감) - 심진현(광흥주부) - 심종 - 심택지(전라도 수군 절도사) -

 심능완(장진부사) - 심의풍(한성부 판윤(정2품))

 

19. 심상덕 : 명종 국구 심강 - 심효겸(신천군수) - 심핍(호성 원종 공신, 황간현감) -

심정일(수 동지중추부사) - 심가(참봉) - 심수정 - 심조(경학 천거 동몽교관) - 심낙현

(동지중추부사) - 심수(홍문관 교리) - 심홍지(진사) - 심능교 - 심의중 - 심운택 -

심상덕(장례원 전사(정2품))


20. 심악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억 - 심유 - 심수현 - 심악) : 사마, 문과

장원 급제, 옥당, 삼사, 병조참판, 형조 참판, 이조판서 : 서인의 초대 영수 예조 참판

심의겸의 현손이며,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준소의 영수 심수현의 차남이고, 소론 산림

으로써, 강화학파의 거두인 세자시강원 찬선 심육의 동생이다. 또한, 대실학자 심대윤

선생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영조 때, 이조 판서까지 지냈다고 증손인 대학자 심대윤의

유고에 기록되어 있다.

 

21. 심공 (심강 - 심충겸 - 심흔 - 심정화 - 심황 - 심수량 - 심공) : 진사, 문과 장원

급제, 한림, 전랑, 검상, 사인, 옥당, 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홍문관 부제학, 대사성,

경기도 관찰사, 개성부 유수, 한성부 좌윤, 병조참판, 예조참판, 이조참판, 지의금부사


 

[종2품]


[문반]


*
심광세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인조의 이종사촌, 홍문관 응교) 1577(선조10)~1624(인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덕현(德顯),호는 휴옹 (休翁). 영의정 연원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현감 엄 이고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1. 심상찬(
심강 - 심인겸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 심구 - 심풍지 -

심능악 - 심의린 - 심훈택 - 심상찬) : 문과급제, 한권, 직각권, 규장각 직각, 이조 정랑,

 대사성, 이조참의, 참판, 시강원 부첨사, 봉상사 제조, 중추원 1등 의관


2.
심의겸(심강 - 심의겸) : 진사, 문과급제, 호당, 옥당, 전랑, 검상, 사인, 홍문관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 대사간, 대사헌, 개성부 유수, 의주 부윤, 전주 부윤 겸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예조참판

 

3. 심총(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총) : 진사, 음보, 현령, 문과급제, 광주 부윤

[청송 심씨 가승 고첩 행장 기록]


4. 심욱지(위의9번의 심총 - 심약기 - 심충 - 심필현 - 심당 - 심욱지) : 문과급제, 세자

시강원 설서, 동벽, 의주부윤


5. 심명세(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명세) : 음보, 공조좌랑, 사복시첨정, 인조 반정 2등

공신에, 책록됨, 통정대부 오위장, 오위도총부 부총관, 공조참의 겸 호위대장, 내섬시

제조, 원주목사, 공조참판, 사후에, 인조 반정 1등 공신에, 책록됨, 시호는, 충경, 충숙.


6. 심능준(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오 - 심최현 - 심횡 -

심숭지 - 심능준) : 음보, 양곤, 오위도총부 부총관


7. 심이지(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계현 - 심탁 -

심이지) : 사마, 음보, 참봉, 문과 장원 급제, 정언, 사인, 옥당, 승지, 대사성, 공조참의,

이조참의,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형조참판,

비변사 제조, <천의소감>의 찬집당상, 이조참판


8. 심의신(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 심구 -

심건지 - 심능술 - 심의신) : 진사, 음보, 주부, 문과급제, 특별제수 통정대부 대사성,

이조참의, 도승지, 대사간, 충청도 관찰사, 경기도 관찰사, 이조참판, 청백리에 녹선됨.


9. 심영택(위의8번의 심의신 - 심영택) : 음보, 현령, 문과급제, 특별제수 통정대부

대사성, 이조참의, 이조참판


10. 심상목(위의9번의 심영택 - 심상목) : 진사, 문과급제, 삼사,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간, 예방승지, 대사헌, 이조참판

 

* [위의 8번의 심의신 - 위의 9번의 심영택 - 위의 10번의 심상목 -> 3대 연속 문과

급제와 3대 연속 대사성, 3대 연속 이조참의, 3대 연속 이조참판 의 진기록을 남김.]


11. 심의복(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 심구 -

심건지 - 심능적 - 심의복) : 사마, 음보, 호조참판

 

12. 심상학(위의 11번의 심의복 - 심경택<생원, 문과, 대사성, 대사헌, 한성부 판윤,

이조참판, 예조판서, 시호는, 효정, 저서로는, 건연장> - 심상학) : 진사, 문과급제,

삼사, 동벽, 이조참의, 대사성, 예조참판, 신사유람단의 일원


13. 심기택(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태현 - 심약 -

심찬지 - 심능수 - 심의응 - 심기택) : 진사, 음보, 판관, 부사, 문과급제, 부사과, 문과

중시 장원 입격, 대사성, 이조참의, 병조참판, 호조참판


14. 심황(
심강 - 심충겸 - 심흔 - 심정화 - 심황) : 진사, 음보, 현감, 문과급제, 춘방,

전주부윤


15. 심응태(위의 4번의 심공 - 심명억 - 심진 - 심응태) : 진사, 문과급제, 삼사, 대사성,

이조참의, 호조참판


16. 심관(
심강 - 심충겸 - 심흔 - 심정화 - 심식 - 심수준 - 심유 - 심명설 - 심관) : 문과,

한림, 옥당, 공조참판

 

17. 심기태(위의 16번의 심관 - 심기태) : 진사, 문과급제, 한림, 옥당, 병조참판


* [위의 16번의 심관 - 17번의 심기태 -> 부자 참판 기록]

 

18. 심장(심강 - 심충겸 - 심흔 - 심정화 - 심식 - 심수준 - 심장) : 진사, 문과급제, 삼사,

동벽, 병조참판

 

19. 심평(심강 - 심제겸 - 심관 - 심정로 - 심평) : 생원, 문과급제, 홍문관 부제학, 도승지,

강원도 관찰사, 공조참판, 예조참판


20. 심진현(위의 19번의 심평 - 심후준 - 심해 - 심진현) : 생원, 문과 장원 급제, 한원,

삼사, 강원도 관찰사, 예조참판


1. 심권(
심강 - 심예겸 - 심열 - 심희세 - 심권) : 생원, 음보, 별검, 문과급제, 승문원

권지정자, 한림, 전랑, 사인, 동벽, 삼사, 승지, 병조참지, 예조참의, 전라도 관찰사

 

22. 심육 : 소론 산림, 진사 후, 유일 천거 세자시강원 찬선, 성균관 좨주, 형조참의,

형조참판, 호조참판, 대사헌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억 - 심약한 -

심유 - 심수현 - 심육)


23. 심의현(沈宜絢) : 음보, 분역, 시종신, 고종조의 능주 목사, 동지돈녕부사 (가계 :

명종 국구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득현(청풍부사) -

심둔 -심뇌지 - 심능목(진사) - 심의현) : 고종조의 이조 판서와 참정 대신 심상훈의

조부, 고종조의 우부승지, 공조 참판, 공조 판서 심응택의 아버지, 고종조의 판돈녕부사

사궤장자 민치구와 사돈지간.


[무반]

24. 심주(위의 3번의 심총 - 심약황 - 심주) : 별천, 무과급제, 충청도 병마 절도사

 

25. 심해(심강 - 심충겸 - 심흔 - 심정화 - 심식 - 심수인 - 심해) : 음보, 남선,

무과급제, 울진현령, 삼곤, 오위도총부 부총관

 

26. 심녕(심강 - 심충겸 - 심흔 - 심정화 - 심식 - 심수익 - 심박 - 심명석 - 심녕) :

무과급제, 삼곤,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 전라도 병마 절도사,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

 

27. 심휘태(심강 - 심충겸 - 심흔 - 심정화 - 심식 - 심수익 - 심박 - 심명석 - 심렴 -

심휘태) : 기로 무과 장원 급제, 철형장군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장 겸 대구중군


28. 심이원(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명세 - 심진 - 심이원) : 음보, 철형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


29. 심돈(
심강 - 심효겸 - 심척 - 심정준 - 심파 - 심명일 - 심돈) : 무과급제, 순천영장


 

[정3품 당상관]

 

[문반]


1. 심능섭 : 문과, 정랑, 양산군수, 동부승지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총 - 심약하 - 심장 - 심귀현 - 심찬 - 심석지 - 심능섭)


2. 심능식 : 문과, 삼사, 병조참지 겸 지제교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총 - 심약하 - 심장 - 심귀현 - 심도 - 심대지 - 심능식)

 

3. 심약진 : 영조 때, 분무 원종 공신에 책록됨으로써, 영조의 특명으로, 첨지중추부사

에 특별 제수됨.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억 - 심약진)

 

4. 심의승 : 진사, 문과 장원, 삼사, 병조참의, 우승지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오 - 심최현 - 심횡 - 심종지 - 심능열 - 심의승)


5. 심탁 : 사마, 음보 광주목사, (심의경과 그의 아들 심응택이 남긴 가장경람에, 그 행장

이 기록되어 있음.) (가계 : 심강 - 심인겸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계현 - 심탁)


6. 심능필 : 3월제시 장원 직부, 문과, 한림, 통정대부 정주목사 (가계 : 6번의 심탁 -

심이지 - 심능필)


7. 심상진 : 진사, 음보 동몽교관, 문과, 대교, 전랑, 춘방, 삼사, 승지, 대사성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 심구 - 심풍지 -

심능악 - 심의린 - 심순택 - 심상진)


8. 심규 : 사마, 음보 해주목사, 친부인 판돈녕부사 청헌공 심택현이, 분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됨으로써, 그 덕으로, 음보로, 해주 목사에까지 이름.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심택현 - 심규)


9. 심응택 : 음보 돈녕부 도정, 가장경람의 최종 수정 보완자. (가계 : 6번의 심탁 -

심이지 - 심능협 - 심의경 - 심응택)


10. 심능술 : 사마, 음보 상주목사,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의 외숙부로써, 그 덕으로,

순조 때, 음보로, 상주목사에까지, 이름.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 - 심구 - 심건지 - 심능술)


11. 심이섭 : 음보 동몽교관, 문과, 대교, 춘방, 안동부사, 승지 (가계 : 12번의

심의현 - 심응택 - 심상훈 - 심이섭)


12. 심원지 : 음보 이천부사, 세자 책례 경축 특진 첨지중추부사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득현 - 심선 - 심원지)


13. 심능직 : 감제시 장원 직부, 문과, 삼사, 좌승지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득현 - 심관 - 심익지 - 심능직)

 

14. 심정택 : 음보 사산감역, 군수, 참의 (가계 : 15번의 심능직 - 심의석 - 심정택)

 

15. 심추 : 음보 통정대부 나주목사, 친부가, 인조 반정 정사 1등 공신, 진무 원종 공신,

 공조참판, 증 좌참찬, 문숙공 심명세이므로, 그 덕으로, 장남으로써, 음보로, 통정대부

나주목사에까지, 특진됨.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명세 - 심추)

 

16. 심진 : 음보 돈산군수, 여주목사, 역시, 친부가, 위 17번의 심명세이므로, 그 덕으로,

차남으로써, 음보로, 여주목사에까지, 특진됨.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명세 - 심진)

 

17. 심국현 : 진사, 음보 참봉, 감제시 장원 직부, 문과 장원, 첨지중추부사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명세 - 심추 - 심귀서 - 심항 - 심국현)

 

18. 심갱 : 국제시 장원 직부, 문과, 동부승지 (가계 : 위 19번의 심국현 - 심갱)


19. 심의익 : 생원, 음보 돈녕부 도정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오 - 심최현 - 심횡 - 심종지 - 심능열 - 심의익)


20. 심상설 : 문과, 동부승지 (가계 : 9번의 심규 - 심정지 - 심능운 - 심의정 - 심운택 -

심상설)


21. 심능철 : 음보 참봉, 돈녕부 도정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정세 - 심진 -

심약사 - 심윤 - 심방현 - 심환 - 심위지 - 심능철)

 

22. 심상필 : 음보 령, 문과 장원, 대사간, 대사성 (가계 : 심회 - 심원 - 심순문 - 심연원 -

심강 - 심의겸<심회 - 심한 - 심순경 - 심희원 - 심홍 - 심의겸> - 심윤 - 심익세 - 심헌 -

심약제 - 심징 - 심종현 - 심용 -심양지 - 심능식 - 심의석 - 심성택 - 심상필)


23. 심후지 : 사마, 음보 나주목사 (가계 : 심강 - 심의겸 - 심윤 - 심익세 - 심헌 - 심약제 -

심담 - 심보현 -심전 - 심후지)

 

24. 심의건 : 재행 천거 장악원정, 호조참의 (가계 : 심강 - 심의겸 - 심윤 - 심익세 - 심헌 -

심약제 - 심당 - 심보현 - 심전 - 심학지 - 심능용 - 심의건)


25. 심수량 : 문과, 한림, 전랑, 옥당, 이조참의 (가계 :
심강 - 심충겸 - 심흔 - 심정화 -

심황 - 심수량)


26. 심명덕 : 문과, 양사, 좌부승지 (가계 :
심강 - 심충겸 - 심흔 - 심정화 - 심식 - 심수인 -

심해 - 심명덕)


27. 심초현 : 음보 시종신,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가계 :
심강 - 심효겸 - 심핍 - 심정일 -

심가 - 심수범 -심급 - 심초현)


28. 심방 : 문과, 동부승지 (가계 :
심강 - 심제겸 - 심관 - 심정로 - 심평 - 심후준 - 심해 -

심상현 - 심방)


29. 심의순 : 문과, 승지 (가계 :
심강 - 심제겸 - 심관 - 심정로 - 심평 - 심후준 - 심해 -

심주현 - 심명 - 심화지 - 심능숙 - 심의순)


30. 심장세 : 음보 포의 후, 이 괄의 난 이후에, 인조를 호종한 공훈으로, 의금부 도사에,

특별 제수되고, 정묘 호란 이후에는, 인조를 강화도로, 잘 호종한 공훈으로, 부사로, 특진

되고, 청송 심씨 가승집에, 경연 참찬관에 이르렀다고, 기록됨.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장세)


 

[무반]

31. 심추(沈錘) : 무과,첨사 [僉使]절충장군 (가계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심택현 )


32. 심광 : 무과, 첨지중추부사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총 - 심약기 -

심융 - 심달현 - 심광)

 

33. 심택지 : 무과, 전라도 수군 절도사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총 -

심약기 - 심융 - 심진현 - 심종 - 심택지)

 

34. 심만택 : 무과, 첨지중추부사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오 - 심최현 - 심횡 - 심홍지 - 심능묵 - 심의춘 - 심만택)

 

35. 심일택 : 무과, 첨지중추부사 (가계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오 - 심최현 - 심횡 - 심홍지 - 심능훈 - 심의철 - 심일택)

 

36. 심윤태 : 무과, 보성군수 겸 병마 절제사 (가계 : 심강 - 심충겸 - 심흔 - 심정화 - 심식 -

 심수익 - 심박 - 심명석 - 심녕 - 심윤태)

 

37. 심능수 : 무과, 나주 영장 (가계 : 위 36번의 심윤태 - 심능수)


38. 심담 : 무과, 영장 (가계 :
심강 - 심제겸 - 심유 - 심정직 - 심환 - 심필준 - 심담)

   

출처 : - ♣ 청 송 ♣ -
글쓴이 : 청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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