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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송심씨 초전댁 이야기

心泉 심상학 2011. 1. 1. 05:59

 

 

 

 

 

 

명 칭 :  청송 초전댁(靑松 草田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212
건 축 주 :  1806년(병인년, 순종6년)
소 유 자 :  심상훈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1호


건축 이야기
이 고택은 조선 순조 때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청송심씨 17세손인 심덕활(沈德活)이 아들 심헌문(沈憲文)의 네 번째 돌을 기념하여 1806년(순조6년)에 건축한 것이다. 심헌문은 심덕활의 요절한 아우 심덕종(沈德宗)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그후 21세손인 심의해(沈宜海)가 1900년에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축 구성
초전댁은 1806년에 건립된 정면 6칸, 측면 5칸의 목조와가로 구조는 ‘ㅁ’자형이다.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 추녀끝 망와(望瓦)에 초각(初刻)된 내용과 건물평면 유형이 거의 일치하고 있어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넓은 마당에 돌담을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올려 담을 둘렀다. 그리고 마당의 한쪽 귀퉁이에 우물을 두었다.

 

문중 이야기
- 문중이야기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의 증손 심덕부(沈德符)가 우왕(禑王)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진봉되어, 그 후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의 아우 심원부(沈元符)는 고려 말에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일찍이 조선 개국을 시작으로 명문의 지위를 굳혀온 청송심씨는 덕부의 아들 7형제에 가서 가세(家勢)가 크게 융성하였다.
세종(世宗)의 장인이었던 심온(沈溫)은 심덕부의 아들이다. 심온의 장녀는 세종이 즉위하자 중전(中殿 : 소헌왕후昭憲王后)이 되었다. 심덕부의 현손인 심순문(沈順門)은 연산군의 어의(御衣)에 대하여 논한 것이 화가 되어 참형을 당했다.
심순문의 아들로 명종(明宗) 때 영의정에 올라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던 심연원(沈連源)은 왕실의 외척을 경계하였다. 심연원의 아우 심봉원(沈逢源)은 명종 때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고 막내아우인 통원(沈通源)도 명종 때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심연원의 아들 심강(沈鋼)은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버지며, 그의 아들 심의겸(沈義謙)은 서인의 거두로서 사림의 명망이 높았다. 심충겸(沈忠謙)은 임진왜란 때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청림군(靑林君)에 추봉되었으며, 아들 심열(沈悅)은 삼정승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동지돈령부사 심봉원(沈逢源)의 손자 심희수(沈喜壽)도 선조 말에 좌의정에 이르렀고 부사(府使) 심종침의 손자이자 심설의 아들로 효종(孝宗)때의 영의정이던 심지원(沈之源)은 아들 심익현(沈益顯)과 함께 필명(筆名)을 떨쳤다.
심지원의 증손 심사정(沈師正)은 김홍도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영조 때 영의정이었던 심수현(沈壽賢)의 아들은 효자로 이름을 떨쳤다. 선조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했던 심달원(沈達源)의 손자 심우승(沈友勝)은 호조참판에 올랐고, 사후(死後)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심흥원(沈興源)의 손자 심우신(沈友信)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웠던 심기원(沈器遠)은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정조 때 좌의정에 오른 심환지(沈煥之)도 명성을 떨쳤으며, 예조참판 심염조(沈念祖)의 아들 심상규(沈象奎)는 순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철종 때 예조판서 심경택(沈敬澤), 형조판서 심의면(沈宜冕), 공조판서 심의원(沈宜元), 고종 때 영의정에 올랐던 심순택(沈舜澤), 예조판서 심이택(沈履澤),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심상학(沈相學)이 있으며 심상훈(沈相熏)은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와 이조판서를 거쳐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을 역임하였다. 농촌문학의 선구자인 심훈(沈熏, 『상록수』의 저자)도 있다.

관련인물
- 심덕활(沈德活)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청송심씨 17세손이다.

 

청송 > 진보권 > 파천면 덕천리
- 덕천리는 옛날에 상덕천(上德川)과 하덕천(下德川)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행정구역상 덕천1,2,3리로 구분되어 있다. 덕천리 마을 중앙에는 조선 후기 대부호였던 심부자의 송소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송소고택은 3000평 대지에 세워진 99칸의 엄청난 대저택이다. 또 덕천리 입구에는 마을의 액운을 막기 위해 인력으로 만든 인공산이 있다.
송읍소재지에서 진보방향 31번 국도의 2.5km 좌측 파천초교 옆 군도 17번으로 1km지점 우측 하덕천마을에 있으며 인근에 경의재, 소류정이 있다. 중평리에 평산신씨종택, 서벽고택, 사남고택, 사양서원, 송강리 수정사, 신기리 기곡재사, 신기느티나무, 어천리 임하댐, 관리 왕버들 등이 있다.

파천면은 청송군 1읍 7면의 하나이다. 본래 진보군 지역으로 진보읍 남쪽에 있어서 남면이라고 하였으나, 1914년 군읍면 통폐합에 따라 상리면 괴정 일부와 청송군 부서면의 하덕천, 상덕천, 상리, 이사, 신흥, 주점, 지경, 회전, 병보의 9개 동과 같은 군 부내면의 내부곡 일부를 병합하고 면 중앙을 흐르는 파질천(巴叱川)의 이름을 따서 파천면이라 하였다. 현재 관동, 중평, 덕천, 신흥, 지경, 병부, 황목, 어천, 송강, 신기, 옹점의 11개 동으로 개편관할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청송읍과 진보면, 서쪽은 안동시 길안면, 남쪽은 안덕면, 북쪽은 진보면과 접하고 있다.

덕천마을은 안동과 인접한 관계로 그 학풍이 안동지역 사림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퇴계학을 근간으로 삼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덕천마을 선비들은 퇴계학에만 머물지 않고 율곡학도 탄력적으로 수용하였다. 190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덕천마을의 유생들은 많은 학계(學契)를 조직하여, 학맥을 계승하고 학단을 단결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소류정학계, 송소학계, 동천학계, 성산학계, 학산학계, 부산학계, 천은학계, 근제학계, 우송학계, 신재학계 등 20여개의 학계가 구성되어 있다.
8,15해방 이후 신문화가 보급되면서 덕천마을도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다. 이마을에 최초로 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심부자집 둘째아들인 심진섭의 처 진성이씨(眞誠李氏)였다. 그는 1957년 빈터에 교회를 건립하고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신도는 대부분 젊은 청년층과 부녀자들이었다. 그러나 전통 유교 사상의 색채에 워낙 짙은 지역이라, 유림 장로들과 빈번히 마찰하게 되었고 신도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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