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심가뿌리를찾아서

[스크랩] 청송심씨 송소고택 이야기

心泉 심상학 2011. 1. 1. 06:04

 

 

 

 

 

 

 

 

 

 

 

 

 

 

 

 

 

 

명 칭 :  송소고택(松韶古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176
건 축 주 :  심호택(沈號澤)
건축시기 :  1880년(경진년, 고종17년)
이건시기 :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소 유 자 :  심재오
문 화 재 :  중요민속자료 제 250호, 2007.10.12 지정

건축 이야기
조선 영조 때의 부자 심처대(沈處大)의 7세손 송소(松召) 심호택(沈號澤)이 1880년대에 건립한 집으로, 전형적인 조선후기 한옥구조를 띠고 있다. 규모가 매우 커서 별묘까지 합쳐 대지 면적만 2,700평이나 된다.
 
1900년 초 개화사상과 신학문을 수용하려는 바람도 심부자집에 의해 주도되었다. 심상원은 그의 장남 심운섭(沈雲燮)을 서울의 휘문학교로 보냈고, 둘째아들 진섭(震燮)과 셋째아들 영섭(靈燮)을 일본 주오대(中央大)에 보냈다. 또한 1957년에는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교회는 신상원의 둘째아들 신진섭의 처 진성이씨(眞誠李氏)가 건립한 것이었다.

190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덕천마을의 유생들은 많은 학계(學契)를 조직하여 자신을 가르친 문인들의 학은을 기리기 위한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소류정학계, 송소학계, 동천학계, 성산학계, 학산학계, 부산학계, 천은학계, 근제학계, 우송학계, 신재학계 등 20여개의 학계가 구성되어 있다.

건축 특징
바깥마당에서 안채로 드나드는 사이가 사랑채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헛담을 쌓았다. 이는 조선시대 남자와 여자들의 생활공간 구분을 뚜렷이 했던 전통적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건축 구성
집전체가 ㅁ자형의 몸체를 중심으,로 큰 사랑채, 그리고 우측에 작은 사랑채, 뒤로는 안채로 구성되어 있고 우사 옆으로 곳간이 지어져 있다. 사당은 집 뒤에 따로 떨어져 있다.
길에서 대문까지는 공터로 되어 있으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양 옆으로 있고, 그 중앙에 안채로 드나드는 대문이 있다. 사랑방 앞마당에는 대문을 중심으로 작은 사랑 마당과 큰 사랑 마당을 둘로 나누는 담장이 쳐져 있으며, 담장 왼쪽 큰 사랑 쪽에는 화단을 만들어, 회양목 전나무 등을 심어 놓았다. 이 나무로 작은 사랑 쪽에서나 대문을 들어설 때나 큰 사랑을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며, 두 칸은 사랑방 제일 웃어른이 거처하며 앞쪽 3칸은 늪마루로 되어 있다. 늪마루 뒤에는 공부방, 그 뒤는 책방으로 이어진다. 우측에 작은 사랑채가 있다.
안채는 좌로 3칸이 뒤주, 고방 등으로 이어져 있으며, 우측 3칸은 식모방, 부엌, 부엌이다. 뒤에는 유상고, 식모방과 고방이 있다. 안방 앞 부엌 쪽으로 우물이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3칸으로 가장 우측에 큰 부엌이 있고 큰 부엌 다음에 안방 2칸, 그리고 마루방이 2칸 있는데, 안방 앞에는 마루가 3칸이다. 그 다음 안 사랑방이고 바깥 사랑과 안채가 이어져 ㅁ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 우측에는 후원으로 드나드는 문이 있고, 문을 열고 나가면 방앗간이 있다. 방앗간 뒤로 작은 고방이 하나 있다.
별당은 두 채인데 하나는 대문채이고 또 하나는 별당이다. 별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앞 칸은 마루, 뒤쪽은 별당이다.

 

관련인물
- 심호택(沈琥澤, 1862-1930)
심호택은 자가 계오(啓五)이고 호가 송소(松召)이다. 경주 최부자와 함께 영남의 갑부로 명성을 떨쳤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검소했다. 구한말 한때 청송에서 대구까지 갈려면 심부자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다 할 정도로 자기 땅이 없는 곳이 없었다.

 

청송 > 진보권 > 파천면 덕천리
- 덕천리는 옛날에 상덕천(上德川)과 하덕천(下德川)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행정구역상 덕천1,2,3리로 구분되어 있다. 덕천리 마을 중앙에는 조선 후기 대부호였던 심부자의 송소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3000평 대지에 99칸의 엄청난 대저택이다. 또 덕천리 입구에는 마을의 액운을 막기 위해 인력으로 만든 인공산이 있다.
송읍소재지에서 진보방향 31번 국도의 2.5km 좌측 파천초교 옆 군도 17번으로 1km지점 우측 하덕천마을에 있으며 인근에 경의재, 소류정이 있다. 중평리에 평산신씨종택, 서벽고택, 사남고택, 사양서원, 송강리 수정사, 신기리 기곡재사, 신기느티나무, 어천리 임하댐, 관리 왕버들 등이 있다.

파천면은 청송군 1읍 7면의 하나이며, 본래 진보군 지역으로서 진보읍 남쪽에 있으므로 남면이라고 하였으나 1914년 군읍면 통폐합에 따라 상리면 괴정 일부와 청송군 부서면의 하덕천, 상덕천, 상리, 이사, 신흥, 주점, 지경, 회전, 병보의 9개 동과 같은 군 부내면의 내부곡 일부를 병합하여 면 중앙을 흐르는 파질천(巴叱川)의 이름을 따서 파천면이라 하여 관동, 중평, 덕천, 신흥, 지경, 병부, 황목, 어천, 송강, 신기, 옹점의 11개 동으로 개편관할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청송읍과 진보면, 서쪽은 안동시 길안면, 남쪽은 안덕면, 북쪽은 진보면과 접하고 있다.

덕천마을은 안동과 인접한 관계로 그 학풍이 안동지역 사림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퇴계학을 근간으로 삼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덕천마을 선비들은 퇴계학에만 머물지 않고 율곡학도 탄력적으로 수용하였다. 190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덕천마을의 유생들은 많은 학계(學契)를 조직하여, 학맥을 계승하고 학단을 단결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소류정학계, 송소학계, 동천학계, 성산학계, 학산학계, 부산학계, 천은학계, 근제학계, 우송학계, 신재학계 등 20여개의 학계가 구성되어 있다.
8,15해방 이후 신문화가 보급되면서 덕천마을도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다. 이마을에 최초로 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심부자집 둘째아들인 심진섭의 처 진성이씨(眞誠李氏)였다. 그는 1957년 빈터에 교회를 건립하고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신도는 대부분 젊은 청년층과 부녀자들이었다. 그러나 전통 유교 사상의 색채에 워낙 짙은 지역이라, 유림 장로들과 빈번히 마찰하게 되었고 신도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