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판문하부사와 영삼사사를 거쳐 정종 즉위년에는 좌정승에 이르렀고요
새 왕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심원부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습니다
가세가 크게 융성하여 화려한 인맥을 이루었고요
심온은 청성군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상왕이 쥐고 흔드는 것을 부당하다고 병조판서 박습에게 불평한 것이 상왕의 귀에 들어가 옥사가 일어난 것이죠
영의정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피체되어 한양에 압송된 후
수원에서 사사 됀 것입니다
그후 심씨는 대대로 그 유언을 지켜 박씨와는 혼인을 않다가 심의, 심융이 박씨와 혼인을 했는데
후손에 아들이 없거나 자손이 융성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심온의 둘째 아들인 심회는 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하여 영상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크기를 논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갑자사화 때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참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죄업은 죽음을 두고 대간들이 무척 논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립감정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그의 할아버지인 심회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 영의정이였다는
연유로 관직이 추탈되고 부관참시 되었으며,
그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앞길에서 형을 당했으므로 일생동안 그 앞을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하며,
항상 왕실의 외적됨을 경계하여 그의 손자 이름들을 모두 겸자 돌림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림, 글씨, 음률, 의술에 능통하여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산수틈에서 여생을 살았는데, 옷은 반드시 무게를 달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지어 입었으며
밥도 숟갈을 세어서 먹었고, 씹는 것도 그 속도나 회수가 정해져 있다고 하며 동작도 휴식도 조절하였고
마음쓰는 것도 그 심도의 분량을 근량으로 재는듯 했다고 합니다
심연원의 아들 심강이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아버지로 활인서 별좌를 거쳐 청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영돈령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심연원은 권귀 속에서도 가풍을 지켜 신진사류로서 화를 당하려던 박순 등을
아들 심의겸과 함께 구하고 권신 이양을 제거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심연원의 아들 심의겸은 서인의 거두로써 선조 때 좌부승지와 대사간 이조 참의를 지내는 동안
사림의 명망이 높았으며, 아우 심충겸은 임진왜란 때 호성이등공신으로 청림군에 추봉되었습니다
한편 심중겸의 아들 심 열은 인조 때 경제에 능한 정치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좌의정, 우의정과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습니다
동지돈령부사 심봉원의 손자 심희수는 선조 말에 이조 판서와 양관 대제학, 좌·우찬성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광해군이 즉위한 후 권신 이이첨의 만행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에 전임되어,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 정 온을 구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고요
특히 그는 상신의 벼슬을 지내면서도 허물어져 가는 집 한 채 밖에 없어서 임금이 대궐의 말 한 마리를 보내어 팔아서 집을 고치라고 시켰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으며, 만년에 둔지산에 들어가 시로써 여생을 보냅니다
부사 심종심의 손자이자 심설의 아들로 효종조의 영상이던 심지원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아들 심익현과 함께 필명을 떨쳤으며, 지원의 중손 사정이 산수화에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저명했습니다
영조 때 영의정으로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 달력을 만드는 신법을 연구해 오게 했던
심수현의 아들 심육(찬선을 지냄)은 효자로 이름을 떨쳤고요
선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했던 심달원의 손자 심우승은 호조 참판에 올라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의 행패를
다스리다가 무고를 당했고, 그후 한성부 우윤을 거쳐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호성이등공신으로 청계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심흥원의 손자 심우신은 임진왜란 때 가재를 팔아 수천명의 의병을 일으켜 창의사 김천일과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습니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으로 청원부원군에 봉해졌던 심기원이 좌의정을 역임하여,
정조 때 좌의정에 오른 환지와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예조 참판 심염조의 아들 심상규는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당시의 제 1인자로 손꼽혔고요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때 용맹을 떨쳤던 심우정의 아들 심현이 인조 때 여러 군현의 수령을 지내고
돈령부 도정에 이르러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종사를 따라 강화에 피난가서 청병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묘의 위패를 땅에 묻은 후 국난의 비운을 통탄하는 유서를 쓰고 부부가 함께 자결했습니다
역사상 이들 부부처럼 태연하고 절도있는 죽음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때 부부의 나이가 70세였다고 합니다
조카 심동구가 배를 대놓고 피난할 것을 발을 구르며 재촉하고 있는데 심현은 애써 돌려보내고 조복을 입은
다음 동향사백을 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유소를 지었습니다
심신, 심현은 동향사배하고 '남한산성에 계신 주상전하에게 올리옵나이다'로 시작된 이 글의 내용은
임금에 대한 보은의 죽음을 전하는 내용이였습니다
그 유서를 외손자 박장원에게 주어 배를 태워 보낸 다음 부인 송씨를 돌아보며 '정은 백년을 같이하고 의는
한번 죽음을 같이하니 내가 충신이 되고 그대는 충신의 아내가 되지 않겠는가' 하며 함께 죽을 것을 권유하자,
송씨는 '종용당고사' - (죽음이 주는 생리적 고통이나 정신적 갈등을 무화시킨다는 뜻)를
본받겠나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갑시다'하고는 목을 매었는데, 서로의 어깨를 짚고 편안히 운명에
종용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고 하네요
구한말에 와서는 철종 때 한성부 심판윤과 대사헌, 예조 판서 등을 지낸 심경택, 형조 판서 심의면, 공조 판서를
거쳐 기로소에 들어간 심의원, 고종 때 영의정에 올라 청, 일 강대국 사이에 끼인 조선의 갖가지 어려운 정치적
고비를 겪었던 심순택, 예조 판서 심이택, 협판교섭통상사무 심상학이 유명했으며,
심상훈은 협판내무부사와 이조 판서를 거쳐 선혜청 당상을 역임하여,
농촌문학의 선구자인 심훈(본명 대섭, 상록수 저자)과 함께 [명문 청송 심씨]를 더욱 빛냈습니다
3 청송심씨 4 동래이씨
5 대구서씨 6 청주한씨
7 연안이씨 8 남양홍씨
'청송심가뿌리를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포장증 (0) | 2011.06.17 |
---|---|
[스크랩] 가족과 함께 심온 시조묘 방문(아버님83회 생신) (0) | 2011.06.13 |
[스크랩] ★ 한국 성씨 탄생의 비밀 ★ (0) | 2011.03.08 |
[스크랩] 청송심씨 송소고택 이야기 (0) | 2011.01.01 |
[스크랩] 청송심씨 초전댁 이야기 (0) | 2011.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