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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대 상신 가문 청송심씨/"삼한갑족 제1호"의 긍지!

心泉 심상학 2017. 6. 25. 11:32

공지사항, 3대 상신 가문 청송심씨/"삼한갑족 제1호"의 긍지!
     한국명문 (2004-11-12 오후 10:47:03)   Hit : 194   Vote : 26  




공지사항,조선조 중,후기 3대 상신 가문 청송심씨/"삼한갑족 제1호"의 긍지!

청송심씨 3대 화제의 인물[명종국구 심강 직계]이 아래와 같이 차례로 나갑니다. 아래의 글 중 최무선의 화
포 최초 사용 관련 문구는 앞글에서 지우고 퍼다가 여기에 옮긴 점 양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앞에서는 간략
한 설명에 그치는 것이 바람직하고 여기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1, 청송심씨, 700년 명가의 창업주 심덕부
2, 청송심씨, 700년 명가의 중흥조, 비운의 심온
3, 청송심씨, 700년 명가의 인물, 한양 사류의 영수 심의겸


1, 청송심씨, 700년 명가의 창업주 심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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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1328년-1401년. 자는 득지, 호는 노당. 첫벼슬로 2군6위의 하나인 좌우위의 녹사가 되어 국왕의 행
차 때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거나 외국 사신의 송별, 영접 때 경호 업무 등을 봤다.

1364년 수원부의 수령이 되고 중서문하성의 정3품 우산기상시를 거쳐 예의사의 우두머리 관직인 예의판서
가 되었다. 그뒤 강계도만호, 의주부원수, 서해도원수를 지냈다.

1378년[우왕4]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최고 정무기관 문하부의 종2품 관직인 지문하부사가 되어 서
해도원수를 겸하여 자주 출몰하는 왜구토벌에 앞장 섰다.

오늘날 로켓 무기 일종인 화포를 고려말에 최무선이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화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초
석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 고심하던 최무선은 드디어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원나라 사람 이원으로부터 초
석 제조방법을 간난신고 끝에 알아내서 이 화약을 이용한 18가지 화기를 만들었다. 오늘로 말하면 김정일
이 핵무기를 만들어 내는 성과에 버금가는 개가라 할 수 있다.

1380년[우왕6] 500여 척의 대선단을 거느린 왜구가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금강 하구로 겁없이 쳐들어 왔
다.
이 왜구는 상륙하자 말자 가옥을 불태우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학살을 했다. 심지어 두서너 살짜리 아기를
잡아 배를 갈라 씻어낸 뒤 쌀을 집어 넣어 제단에 올리고 술을 부어 하늘에 고하기까지 했다. 왜구가 지나
는 곳은 시체가 가을걷이한 논밭의 농작물처럼 쌓이고 마을의 웅덩이나 어구의 실개울은 선지피로 붉게 물
들었다.

왜구 침입 소식을 접한 심덕부는 해도 원수 나세와 함께 최무선이 제조한 각종 화약 무기를 최초로 실전
에 사용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 당시 신예 무기인 각종 화포를 탑재한 1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나가 왜구
의 본진이 주둔하는 500여 척 함선에 포를 퍼부어 적선들을 불태웠다. 노략질을 하던 왜구의 패거리들은
혼비백산해서 옥주, 영천 등지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들이 노략질한 쌀이 강원도 산간의 초가를 뒤덮은 폭
설 만큼이나 쌓여 있었고 그 때 붉게 물든 실개울의 선혈이 6,7일이 지나도 붉었다고 한다.

1385년 문하찬성사 겸 동북면상원수로 북청에 침략한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같은
해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우왕이 최영의 말을 따라 요동정벌의 명을 내렸다. 최영을 8도 도통사에 창성부원군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에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에 임명했다. 이 때 심덕부는 서경도원수로 조민수와 함께 좌군에 속했다.

좌우군의 병력이 4만에 가까웠고 말이 2만필이 넘었다. 1388년 4월 18일 서경을 출발하여 의주의 압록강
근처 위화도에 이르렀다. 우왕이 최영만은 붙잡고 못가게 하였다.

요동 정벌군은 장마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는데 떠내려 가는 군졸이 부지기수이며 군량미 소모가 너무 컸
다. 이미 요동정벌 4불가론을 밝혔던 이성계는 마침내 조민수, 심덕부 등 제장과 협의하여 회군을 단행했
다.

회군한 이성계는 숭인문 밖에 진을 치고 회의를 열었다. 이 때 참석했던 심덕부는 이화, 조인벽 등과 함께
궁궐로 들어가 병장, 안마 등을 거둬 나오면서 우왕의 제2비이며 최영의 딸인 영비를 내줄것을 왕에게 요구
했다.

그뒤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운 지 9년만에 심덕부는 조준, 박위, 정도전, 정몽주, 설장수 등과 함께 이
성계를 도와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391년 왕세자가 하정사로 명나라에 가기로 하였다. 그간 국왕을 폐위하고 옹립한 문제에 대해 명나라의
반응이 나올 수 있는 미묘한 시기이므로 왕세자를 수행하는 사절단의 인선에 고려 조정의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이 사절단의 책임자로 시중 심덕부가 뽑혔으며 찬성사 설장수, 밀직부사 민개 등이 수행했다. 사절단 일행
은 6개월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 왔을 때 공양왕과 이성계에 의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392년 7월 개경 수창궁에서 이성계가 즉위식을 올렸다. 이 때 심덕부는 판문하부사로 조선 개국을 맞았으
며 1393년 회군공신1등이 되고 청성백에 봉해졌다. 이미 지난해부터 수도를 개경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
는 의견들이 있어오다가 1393년 태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계룡산을 살펴 본 뒤 권중화 등의 제의를 받아들
여 공주 계룡산으로 천도를 서둘러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경기좌우도 관찰사 하륜이 계룡산은 새 도읍지로 옳지 않다고 상소했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
이 많으므로 1393년 12월에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천도에 관해 성명을 발표했다. " 과인은 깊이 생각해 본
결과 계룡산 천도를 백지화하기로 하였소. 한나라의 도읍은 그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일이요.
계룡산은 강이 없고 남쪽으로 치우쳐 교통마져 불편하여 적지가 아니오. 그래서 오늘 신도읍지 역사를 즉
각 중지하도록 명하였소" 계룡산 천도를 주장하던 진보파 세력과 충청도 천도를 반대하는 수구 골동파에
해당하는 양대 세력이 오늘날과 같이 팽팽하게 맞서 있을 때 나온 임금의 성명은 헌법제판소 결정과 같은
성명이었다.

두 세력의 갈등을 안타갑게 지켜보던 오늘날의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중도 완충 세력을 자임하는 심덕부
가 자기 견해를 밝혔다. "전하, 참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조선의 중심지를 벗어나 외진 충청도
로 도읍을 정한 뒤 인천을 비롯한 경기도 도민들이 전전 긍긍하며 충청도와 경기도 간의 대립을 불러오려
던 판에 내리신 용단이라 8도의 백성들이 쌍수로 환영할 것입니다. 이제 새도읍지는 천만년 흥성지기의 곳
을 물색하시기 바랍니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청성백께서는 마치 좋은 도읍지를 알고 계신 듯 말하는 것 같구료. 어디로 새도읍을
하는 것이 좋을지 한번 말해 보구료."

중국 진나라 때부터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해서 사회 현상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일이 비롯되어 후한
때 아주 성행했다. 우리 나라도 고려시대에 이런 예언이 유행했다. 고려 건국을 정확히 예언하여 그대로 맞
아 떨어져 신승으로 알려진 도선의 비기가 천변지이가 있을 때마다 늘 화제가 되었다.

청성백 심덕부는 "전하! [도선 비기]에 의하면 `왕씨를 대신할 자는 이씨이니 한양에 도읍할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목자씨가 임금되네, 한양 땅에 새나라를 세우네.`라는 동요가 민가에 널리
퍼졌습니다. 그래서 고려 조정에서 한양에 오얏나무를 심어 크게 자라면 잘라내어 그 기운을 억눌러 왔습
니다. 소신은 이 나라 도읍지야 말로 한양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고 아뢰었다.

이에 정도전, 무학대사의 견해를 대폭 수용하여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신도궁궐조성도감을 한양에 설
치했다. 심덕부는 그 조성도감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하는 일을 총괄하였으며, 이어 도
성 축조도감도 설치되어 11만이 넘는 장정이 동원된 신도 건설 대역사에 크게 공헌했다.

1397년 판문하부사,1398년 영삼사사, 1399년 좌정승을 지내고 그 이듬해 73세로 치사했다. 처음 시호는 공
정이며, 나중에 정안으로 고쳤다.

청성백 심덕부는 태조 이 성계가 가장 믿고 중히 여기는 인물로 신왕조 건설에 크게 한몫을 했을 뿐만 아니
라 아들 일곱을 낳아 다섯째 아들[온]이 세종의 장인이 되게 하고, 여섯째 아들[종]이 태조의 부마가 되
게 하여 조선조의 "삼한갑족 제1호"로 향후 700년을 한결 같이 쇠하지 않는 명문 거족으로 탄생시켰다.

흔히들 조선조 명문을 논하는 자리에서 청송심씨가 단골 메뉴로 손꼽히는 이유는 심덕부로 시작한 3대 상
신 배출 덕분이다. 심덕부에서 심온, 심회에 이르는 [3대 연속 상신]은 조선조에서 딱 세 번이 있었을 뿐이
다. 대구 약봉 가문의 서종태, 서명균, 서지수로 내려오는 3대 상신, 청풍김씨 관복재 김구 가문의 김구, 김
재로, 김치인에 이르는 3대 상신이 바로 그것이다. 3대 상신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3대 대제학은 부자 문묘 앞에서는 큰 소리를 못치는 것이 그 당시 사회 분위기이다. 부자 문묘 배향은 아무
도 도전을 할 수 없는 조선 사회의 영원한 영광이다. 그 당시 광산김씨 부자 문묘 배향을 중세기 로마 카톨
릭 전성기에 비유하면 부자 교황을 낸 영광보다 그것을 더 대단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명예의 일종일 뿐이고 조선의 3대 상신은 그 당시 그 사회에서는 오늘날 부시가 미국 대통령에 삼선되는 영
광보다 훨씬 더 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실익이 있는 영광이었다.

그런데 청송심씨는 이 세 집의 영광 중에서도 혼자 노른자위를 차지했다. 왜냐하면 다른 두 집은 3대 상신
이라도 3대가 다 수상이 아니고 부수상이 한 명씩 끼여 있기 때문이다. 약봉 집은 서명균이 좌의정이고, 관
복재 집은 관복재 김구 자신이 우의정에 머물렀다. 오직 청송심씨만이 3대 수상을 냈다. 이것은 심씨가 조
선조 "삼한갑족 제1호"라는 긍지를 가질만한 것으로 조선조에 있어 전무후무한 기록이며 조선 보학사에 영
원히 남는 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청송심씨부사공파종회
글쓴이 : 심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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