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심씨 시조 심홍부의 묘입니다.
시조 심홍부 묘
측면에서 본 묘역
右水到左 형국에서는 左旋龍으로 혈을 결지해야 더욱 좋은 혈이 되는데, 이자리는 右旋으로 順水하며 혈을 결지하는 모습으로 이점이 조금 아쉽습니다. 만약 좌선으로 물과 역수가 되게 결작했다면 더욱 좋은 자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산에서 낙맥하여 위이하며 내려오는 내룡의 변화와 힘이 대단한 명당(혈)입니다.
빵빵하게 기운을 모아 혈로 보내지는 기운으로 볼때 발복이 오래 갈 것으로 예단할 수 있습니다.
조안산 전경입니다.
좌 청룡 45도 방의 모습
조안산 전경
우 백호 45도 방의 모습
자세히 보면 묘 앞쪽에 작고 둥그런 봉이 안산이 되고 있습니다.
오목한 음금의 산 너머로 주왕산의 기상이 보입니다.
내룡과 입수처의 모습으로 다시 보아도 정말 멋집니다.
이런 자리는 천광시에 뒤는 깊고, 앞은 낮아 봉분으로 잘 보완을 하여야 합니다.
묘비
孕(잉= 잉태, 애를 밴 모습 )이 참 좋아 보입니다.
양래음수, 음래양수의 이치를 깨우치고, 기감을 정확히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재혈할 수 없는 자리라 생각해 봅니다.
후손들이 묘역을 새로 잘 단장하고 또한 잘 돌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 1세 심홍부
2세 심연
3세 심룡 - 配位 김씨부인
4세 심덕부(좌의정)
5세 심온(영의정)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 딸 소헌왕후(세종비)
6세 심회(영의정)
청송심씨 시조는 심홍부(沈洪浮)이며, 시조의 묘는 경북 청송에 있고,
2세 심연(沈淵)의 묘는 전북 익산시 함열에 있으며, 이 묘도 매우 좋은 명당(혈)입니다.
심연의 묘는 명당을 찾아 모시기 위해 멀고 먼 전라도 땅까지 가서 모셨다고 전해 옵니다.
3세 심룡(沈龍)의 묘와 배위 김씨부인 묘는 경기 안성에 있는데 심룡의 묘가 대혈이며, 부인의 묘도 매우 좋습니다.
심룡은 시조 심홍부의 손자이며, 조선조 개국공신 심덕부의 부친이며,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沈溫: 영의정, 소헌왕후 아버지)의 조부이다.
심룡의 아들 심덕부는 좌의정, 손자 심온은 영의정, 증손자 심회(沈澮) 역시 영의정에 올라 3대 정승이 되었으며, 이후에도 벼슬이 끝이지 않았습니다.
특징은 몇대를 이어 명당에 묘를 썼다는 점이며, 이런 경우 큰 인물들이 줄줄이 배출되게 되는데, 이렇게 몇대에 걸쳐 명당을 쓴 집안의 예로는 4세 6정승을 배출한 청풍김씨 집안과 근대의 울산김씨 김성수 가문 등을 들수가 있습니다.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의 증손 덕부(德符)가 우왕(禑王)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청송(靑松)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중부 동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청기현(靑己縣)인데 신라(新羅) 때 적선(積善)으로 고쳐서 야성군(野城郡 : 현 영덕군)에 속했다가 고려(高麗) 초에 부이현(鳧伊縣)이 되고 운봉(雲鳳)으로 개칭하여 예주(禮州 : 영해)에 속했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진보현(眞寶縣)에 합하였고 1419년(世祖 元年)에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 후에 진보와 분리되고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靑松)으로 개칭하였으며, 부(府)로 승격하고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
덕부(德符)는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와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1399년(정종 1)에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원부(元符)는 고려말에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王朝)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일찍이 조선(朝鮮) 개국(開國)을 시작으로 명문벌족(名門伐族)의 지위를 굳혀온 청송심씨는 덕부의 아들 7형제 대(代)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융성하여 가장 화려한 인맥(人脈)을 이루었다. 세종(世宗)의 장인이면서도 상왕(上王)인 태종(太宗)의 비위에 거슬려 끝내 왕명(王命)으로 죽음을 당했던 온(溫)은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다섯째 아들이다.
온(溫)의 장녀는 태종의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중전(中殿 : 昭憲王后)이 되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병권(兵權)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온(溫)의 막내 아우인 정이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에게 “내금위(內禁衛)에 군사의 결원이 심해 시위(侍衛)가 허소(虛疎)한 바 어찌 전보(塡補)하지 않는가”하니 강상인이 “군사를 한곳으로 모은다면 어찌 그 다소(多少)를 논 하겠는가” 하였다. 이 말이 상왕의 귀에 들어가 무술옥사(戊戌獄事)가 일어났다.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박 은(당시 좌의정)이 “심 온(沈 溫)에게 인심이 쏠린다”고 고변하여, 영의정(領議政)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주(義州)에서 피체되어 한양에 압송된 후 수원(水原)에서 자진(自盡)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온(溫)은 “내 자손들은 대대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 후 심씨는 대대로 그 유언을 지켜 박씨와 혼인을 논하지 않다가 온(溫)의 현손(玄孫) 의(부사맹 의창(義昌)의 아들)와 융( 경력 의검(義儉)의 아들)이 박씨와 혼인했는데 후손에 아들이 없거나 자손이 융성하지 못하였다.
온(溫)의 아우 종(淙)이 태조의 부마로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고, 온(溫)의 둘째 아들 회(澮)는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여 3대[4세 덕부(德符), 5세 온(溫), 6세 회(澮)] 영상(領相)의 영예를 누렸다.
회(澮)의 아들 3형제 중 막내 원(湲 : 내자시 판관(判官) 역임)의 아들 순문(順門)은 장령(掌令)으로 연산군의 어의(御衣)에 대하여 크기를 논(論)한 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옥사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했다. 「정암연주(靜庵筵奏)」에 의하면 그는 임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죄목으로 화를 입었다고 하며, 그의 죽음을 두고 대간들이 무척 논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일설(一說)에는 순문(順門)이 무척 사랑했던 기생을 연산군이 강탈해 간 일이 있었는데 이 같은 관계를 둔 연적(戀敵)에 의한 대립감정이라고 한다. 또 그의 할아버지 회(澮)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尹氏)에게 사약을 내릴 때 영의정이었다는 연유로 관작(官爵)이 추탈(追奪)되고 부관참시 되었으며, 그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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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송심씨(靑松沈氏)는 남한(南韓)에 총 65,744가구 212,7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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