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심가뿌리를찾아서

자랑스런 청송 심씨

心泉 심상학 2019. 5. 6. 22:03

심가네 위상 1| 지기 자료실

심상동 | 조회 32 |추천 0 | 2016.02.11. 15:22

3대 상신 가문/청송심씨, 삼한갑족, 700년 명가! (심연원 문중) 심씨의 위상 (1)


3대 상신 가문/청송심씨, 삼한갑족, 700년 명가! (심연원 문중)


파조의 선조 3대 연속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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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덕부[문하 시중, 문하 좌시중, 문하 좌정승, 수상(영의정)] 

 

문하시중 청화부원군 심용의 장남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수원부사, 판위위시사, 우왕 때, 우상시<우승지>, 예의 판서<예조 판서> 겸 강계 도만호, 밀직부사 겸 의주 부원수, 서해도 부원수를 거쳐,

 밀직사사<지중추부사>로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뒤에, 추성 협찬 공신에 책록되었다. 

 판밀직사사<판중추부사> 겸 지문하부사<의정부 찬성>로 있었을 때인 1380년, 진포 대첩에서, 총지휘관인 서해도 도원수로써,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과 함께, 서천 진포에 침입한 500여척의 왜선을, 우리 고려 누선 40척만으로,

최무선이 우리 나라 최초로 발명한 화약과 화포를, 최초로 실전에 사용하여, 전멸시켰다.

1385년, 문하 찬성사<의정부 찬성> 겸 동북면 상원수로서, 동북면 도원수인 이성계와 함께, 북청에 침략한 왜구를 토벌하는 등

이성계와 함께 동북면에 침구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겨울, 하정사(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388년, 명나라 요동 정벌 때, 요동원정군 서열 3위(좌군도통사 조민수가 서열 1위,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서열 2위)인 서경 도원수<평양 유수>로써,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여, 우왕을 폐하였으며, 창왕 때, 위화도 회군 2등 공신에 책록되고, 판삼사사<판중추부사>로써,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중흥 9공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공양왕 즉위년<1389년>에, 중흥 9공신으로써, 삼한 벽상 공신에 책록되고, 문하 수시중<부수상>을 거쳐,

문하 시중<수상, 영의정> 겸 판도평의사사사 겸 영효사관사 겸 판상서성사 겸 팔위 상호군 겸 영경연관사에 올랐다. 

얼마 후에, 문하 좌시중<수상, 영의정> 겸 경기좌도·경기우도·평양도 도통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1390년에, 청성군 충의백()에 봉해졌다. 같은 해에, 무고로 인하여 황해도 토산()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391년에, 문하 좌시중<수상, 영의정>으로 복직되어, 공양왕의 세자(世子) 석(奭)을 따라 명나라 북경에 조회하고 돌아와, 

안사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이듬해인 1392년에,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자, 자신이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문하 좌시중을 사직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나,

판문하부사마저도 스스로 사직하고, 은거하던 중, 조선이 개국하자, 1393년<태조 2년>에, 조선 개국 위화도 회군 1등 공신에 제1순위로 책록되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1394년<태조 3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 판사로써, 수장 도감 제조가 되어, 새 도성인 한양에 궁궐<경복궁>과 종묘를 건설하는 일을 총괄하여,

1년내에 완성시켜, 새 왕조의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98년<태조 7년>에, 판문하부사, 영삼사사를 거쳐, 1399년<정종 1년>에, 문하부 좌정승<수상, 영의정>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1400년<정종 2년>에,

노환으로 치사하였으며, 다음해인 1401년<태종 1년>에, 죽었다.

청백리로도 이름이 났다.

다섯째 아들 [심온]은 세종의 국구가 되었고, 여섯째 아들 [심종]은 태조 이성계의 부마가 되었다. 시호는 정안이다.

 

심온[세종의 국구, 영의정] 

 

조선 개국 1등 공신 문하시중 청성백 정안공 심덕부의 오남이고, 태조 이성계의 부마 청원군 심종의 형이다. 

고려 말, 11세에 일찍,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조선 초 태조 이성계 때, 병조 의랑<병조 정랑>,

정종 때, 대호군, 태종 이방원 때, 상호군을 거쳐, 우부대언<우부승지>으로 있었을 때인 1408년<태종 8년>에,

그의 딸이 충녕군<세종>의 부인이 되어, 경숙옹주<군부인>에 책봉되었고, 이후에, 좌부대언<좌부승지>을 거쳐,

풍해도 도관찰사<황해도 관찰사>로 있었을 때인 1412년<태종 12년>에는, 그의 사위 충녕군<세종>이 충녕대군<세종>으로 진봉되었다.

이후에, 참지의정부사, 경성 수보 도감 제조를 지내고, 1413년<태종 13년>에, 대사헌으로써, 태종에게 육조 직계제의 시행을 건의하였고

 이후에, 의흥삼군부 우군 총제, 의흥삼군부 좌군 총제, 노비 변정 도감 제조, 의금부 제조, 형조 판서, 호조 판서, 의흥삼군부 좌군 도총제,

의정부 참찬, 판한성부사, 진헌색 제조를 거쳐, 이조 판서로 있었을 때인 1417년<태종 17년>에, 앞서 충녕군<세종>이 충녕대군<세종>으로

진봉됨에 따라, 그의 딸도 삼한국대부인<부부인, 대군부인>으로 진봉되었다.

이후에, 공조 판서로 있었을 때인 1418년<태종 18년> 6월 5일에, 충녕대군<세종>이 형인 폐세자<양녕대군>를 대신하여,

새 왕세자<세종>에 책봉되자, 그의 딸도 경빈<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그와 동시에, 그도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후에, 의정부 참찬을 거쳐, 의정부 찬성으로 있었을 때에, 충녕대군<세종>이 왕세자<세종>가 된지 두 달만인 1418년<태종 18년> 8월 11일에,

태종 이방원의 양위로, 왕세자<세종>가 왕<세종>으로 즉위하자, 그의 딸도 세종의 왕비<소헌왕후>에 책봉되었고, 그는 세종의 국구가 되어,

청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영상, 수상>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소헌왕후의 밀정인 강상궁의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궂이, 조선 한양으로 귀국하는 도중, 상왕 태종 이방원의 외척 제거 정책에 의하여, 누명을 쓰고, `강상인의 옥' 사건의 수괴로 지목되어,

의주에서 피체되어,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어, 심한 심문을 받고, 수원으로 압송되어, 억울하게 사사되었다.

후에, 무고로 밝혀져, 외손자인 문종 때, 신원 복관작되었다.

시호는 안효이다.

'강상인의 옥사' 의 전말은 이러하다.

심온이 영의정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갈 때, 한양 도성안은 텅텅 빈 반면, 심온의 행차길은 심온을 마중나온 인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쩍북쩍거리고 떠들썩했다.

심온의 행차는 그야말로 국왕의 행차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의 장인인데다가 영의정까지 겸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행차로 상왕 이방원은 심온과 그의 일가를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고, 평소, 심온과 사이가 안 좋았던 박은마저,

"모든 인심이 심온에게 쏠린다." 라며, 심온이 왕위마저 빼앗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자, 상왕 이방원은 심온과 그의 일가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심온이 명나라로 떠난 지 두 달 후, 심온의 아우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총제 심정(沈 泟)이 상왕 이방원의 군국 대사 처리에 불만을 말하는 것을,

조좌랑 안헌오가 밀고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상왕 이방원은 바로 지금이 심온과 그의 일가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좌의정 박은과 의금부 제조 유정현을 시켜, 병조참판 강상인, 

 병조판서 박습, 이조참판 이관, 심온의 동생인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총제 심정을 차례대로 끌어들여, 이들 모두에게 압슬형이라는

최고 단계의 국문까지 가하면서, 이 사건의 수괴가 심온이라는 거짓 자백을 받게 했다. 

이에, 상왕 이방원은 심온이 명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박습, 이관, 심정은 참수하고, 강상인은 능지처참형이라는 최고 형벌을 내렸다.

박습은 처형되기도 전에, 심한 고문을 못 이겨, 이미 의금부 감옥에서 죽은 상태로 참수되었다.

드디어, 심온이 명나라에서 귀국하던 도중, 의주에서 피체되어,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자, 상왕 이방원은 심온에게도 압슬형을 가하여,

자신이 이 사건의 수괴임을 허위 자백받아, 수원으로 압송하여, 자진 사사시켰다. 

심온은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앞으로 박씨와는 절대로 혼인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심회[영의정] 

 

조선 개국 1등 공신 문하시중 청성백 정안공 심덕부의 손자이고, 세종의 국구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의 차남이며,

태조 이성계의 부마 청원군 심종의 조카이다. 

문종 때, 아버지 심온이 신원복관작되자, 돈녕부 주부로,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 부지돈녕부사<동지돈녕부사>를 지냈고,

단종 때, 첨지중추원사<첨지중추부사>,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세조 때, 동지돈녕부사 겸 위장, 중추원사<지중추원사, 지중추부사>, 공조 판서, 판한성부사, 형조 판서, 판중추원사<판중추부사>, 전라도 모민 체찰사,

전라도 도체찰사, 영중추원사<영중추부사>, 경기도 관찰사, 도진무, 영중추부사, 수궁대장, 오위도총부 도총관, 좌의정, 영의정<영상, 수상>에 이르렀고,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예종조에, 영중추부사로서, 익대 2등 공신에 책록되고, 청송군에 봉해졌고, 성종 때, 원상으로서, 정무에 참여하였으며,

청송부원군으로 진봉되고, 좌리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이후에, 장순왕후 존호 가상 진책관을 거쳐, 1476년<성종 7년>에, 다시, 좌의정이 되어, 연산군의 생모이며,

성종의 계비인 폐비 윤씨의 중궁 책봉 주문사로서, 명나라 황제의 윤허를 받고 돌아왔다. 

1479년<성종 10년>에, 좌의정에서 체직당하였으나,

성종이 죽기 1년 전인 1493년<성종 24년>, 7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원로 대신으로써, 궤장까지 하사받으며,

성종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청송부원군, 원임 대신, 영부사로써, 계속해서, 가장 중추적으로 정무에 참여하였고,

경기 진휼사, 군자감 제조, 군자 조성 도감 도제조, 유도대장, 군기시 제조 등을 겸직하였다. 

1491년<성종 22년>에, 74세의 나이로, 궤장을 하사받았다.

기로연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사후, 연산군 때에, 1482년<성종 13년> 폐비 윤씨가 사사될 때에, 원로 대신으로써, 이를 방관하였다고 하여,

정창손, 한명회와 함께, 부관 참두되었으나, 중종 반정으로, 신원복관작되었다.

조선을 비롯한 전 세계 역사상, 유일한 `3대 연속 수상(영의정)' 의 진기록을 남겼으며,

'3대 연속 정승' , `부자 영상' , `조손 수상' 의 기록도 남겼다.

시호는 공숙이다. 



 

파조의 아버지,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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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원[영의정] 

 

조선 개국 1등 공신 문하시중 청성백 정안공 심덕부의 5대손이고, 세종의 국구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의 고손이며, 

 영의정 청송부원군 공숙공 심회의 증손이고, 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 익효공 심강의 아버지이다.

김안국의 문인으로, 1522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한림으로써, 152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사복시 부정으로서,

경상도 진휼 경차관<경상도 구황 경차관>에 뽑혀, 백성들의 구황과 기근을 잘 해소시켜 주었다. 

이후에, 의주 목사, 군기시정, 탐라 목사, 1538년 동부승지, 1539년 예조 참판 겸 중국 명나라 장성 황후 붕서 진향사, 병조 참의, 대사간,

1540년 경상도 관찰사, 공조 참판, 1541년 대사헌, 대사성, 1542년 경연 특진관, 형조 참판, 1543년 한성부 좌윤, 1544년 사역원 제조, 호조 참판,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한성부 판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 좌참찬, 예조판서,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좌찬성을 거쳐,

1548년 위사 공신에 책록되어, 청천군에 봉해지고, 우의정에 올랐다. 1549년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청천부원군으로 진봉되고,

 1550년 좌의정 겸 영경연관사 겸 감춘추관사로서, <중종 실록>과 <인종 실록>의 편수를 모두 총괄 감독하였다.

1551년 영의정에 올랐다.

1553년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선수도감 도제조가 되어, 경복궁의 복원과 수리를 총괄 감독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준경과 남치근, 김경석에게 각각 전라도 도순찰사와 전라 좌도 방어사, 전라 우도 방어사를 맡기어, 왜구들을 잘 막아내었다. 1

557년 영의정으로서, 세자시강원 부를 겸하였다.

1558년 노환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경학에 밝고 문장을 잘 했다.

정사를 잘 돌보아 능력있는 영의정으로 명망이 매우 높았다. 명종의 묘정에 종묘배향되었다.

시호는 충혜이다.


파조 명종 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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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강[명종의 국구] 

 

조선 개국 1등 공신 문하시중 청성백 정안공 심덕부의 6대손이고, 세종의 국구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의 5대손이며, 

 영의정 청송부원군 공숙공 심회의 고손이고, 영의정 청천부원군 명종 묘정 배향 충혜공 심연원의 아들이다.

인순왕후의 아버지이다.

1542년 그의 딸(인순왕후)이 중종의 두 번째 적자 경원대군(명종)의 부인(부부인, 대군부인)이 되었다.

 154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음보로, 활인서 별좌에 있다가, 1545년 경원대군(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종의 국구로서, 청릉부원군에 봉해지고,

1548년 영돈녕부사(정1품)가 되었다.

1563년 이조판서로서 세도를 부리던 처남 이양이 기대승, 허엽, 윤두수, 박순 등을 제거하려 하자,

이에, 심강과 그의 아들 심의겸이 이양을 제거하고, 그들을 구출하여, 사림으로부터 많은 칭송을 들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익효이다. 


4명의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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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열[영의정] 

 

공서의 영수로서, 영의정 청천부원군 명종 묘정 배향 충혜공 심연원의 증손이고, 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 익효공 심강의 손자이며,

병조판서 청림부원군 충익공 심충겸의 차남이다. 명종의 외조카이다. 

 1593년 문과하여, 광해군 때, 4도의 관찰사와 예조판서를 지냈고, 

1623년 인조 반정 후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특히, 당시에, 국가 재정을 가장 잘 보기로 유명하였다.

1638년 우의정, 1643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충정이다.

심수현[영의정]

 

준소의 영수로서, 1704년 문과하여, 이태좌 등 16인과 함께 홍문록에 올랐다.

 1714년 양양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충청도 관찰사에 승진했다. 1722년 공조판서,

1724년 병조판서 겸 금위대장 겸 판의금부사 겸 지경연관사 겸 비변사 당상 겸 유사 당상을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1733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1734년 청나라에 가는 사은사에 관상감원을 수행시켜 달력만드는 신법을 연구해 오게 했다.

정사를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여 훌륭한 영의정으로 평가 받았다.

심환지[영의정] 

 

노론 벽파의 영수로서, 1771년 문과하여,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 때, 병조판서로서,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호위 업무, 행차 업무,

군사 업무 등을 총괄하였고,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의 제학, 이조판서 등을 거쳐,

 1798년 우의정을 거쳐,

1799년 좌의정 겸 세자시강원 부에 올랐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자, 

영의정 겸 원상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외척 경주 김씨 김구주와 같은 벽파로서, 신유사옥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했다.

시호는 문충이다.

심순택[영의정] 

 

보수사대당(온건 개화파)의 영수로서, 1850년 문과하여, 승지,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 홍문관, 예문관 양관 제학 등을 지냈다.

그뒤 예조, 형조, 병조, 이조의 판서로 일했으며,

 1884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사대당 내각이 들어설 때, 영의정에 올랐다.

이 때, 청,일 양국의 정치적, 외교적 압박으로부터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1897년 총리대신 겸 원상이 되고, 대한제국이 건국되자, 대한제국의 초대 의정 대신이 되었다.

그 뒤, 궁내부 특진관 겸 태의원 도제조<내의원 도제조>, 제술관, 총호사, 영돈녕원사 등을 거쳐, 

1902년, 대한제국 건국 1등 공신에 책록되고, 대훈위가 되었으며,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적극 상소하였으나, 실패하자, 민영환과 조병세의 뒤를 이어,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양반 사대부들 중에서, 유일하게, '청녕공' 이라는 공작 작위에 봉해졌다.

최고의 영예인 공작에 봉해진 지, 단 5일 만에,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당함과 민영환, 조병세 등의 자결에 대한 화병으로, 그만 별세하시고야 말았다.

시호는 문충이다.


경종 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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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경종의 국구]

 

세종의 국구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의 11대손이고, 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 익효공 심강의 6대손이다. 단의왕후의 아버지이다.

음보로 사옹원 첨정을 지내고,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경종의 국구가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은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효숙이다.
 

 

영조 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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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능건[영조의 부마]

 

영조의 딸 화령옹주와 결혼하여, 청성위가 되었다.

1801년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05년 종척집사가 되었다.

1806년과 1808년 두 차례에 걸쳐 동지정사로 청나라를 더 다녀왔다.
 

 

14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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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의겸은, 영의정 청천부원군 명종 묘정 배향 충혜공 심연원의 손자이고,

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 익효공 심강의 차남이다.

1563년, 자신의 외삼촌인 이조판서 이량으로 인해, 사림이 화를 입게 되자,

아버지 명종의 국구 심강,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과 함께, 외숙인 이량을 탄핵하여, 박순, 허엽, 윤두수 등 많은 사림들을 구해냈다.

후에, 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대사헌, 병조참판, 경연관, 병조판서 등을 지내고, 선조 1575년, 다시 대사헌으로 있었을 때에,

김효원과 함께, 자신의 동생 심충겸의 이조 정랑 임명 문제로, 동,서 분당을 일으켜, 붕당정치의 시조가 되었으며,

박순과 함께, 서인의 초대 영수가 되어, 서인의 시조가 되었다. 

후에, 유수, 관찰사, 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청양군에 습봉되었다. 

 

2. 심충겸은, 동,서 분당의 당사자로, 영의정 청천부원군 명종 묘정 배향 충혜공 심연원의 손자이고,

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 익효공 심강의 육남이며, 붕당정치의 시조 서인의 시조 서인의 초대 영수 병조판서 청양군

심의겸의 동생이다.

임진왜란 때, 병조참판 겸 호조참판 겸 비변사 유사 당상, 병조판서를 지내고, 사후에,

호성 2등 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 겸 대제학에 추증되고, 청림군에 봉해졌다.

광해군 조에는, 위성 1등 공신에 책록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익이고, 글씨를 잘 썼다.

 

3. 심택현은, 영조조에, 이조와 공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판의금부사와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청헌이다. 

 

4. 심수는, 영조조에, 이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었다. 

 

5. 심이지는, 이조판서 심수의 장남으로, 정조조에,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 때, 수어사로서, 정조의 호위를 총괄하였고,

형조, 호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내고, 동지정사가 되어, 청나라에 가다가 병사하였다. 

 

6. 심풍지는, 이조판서 청헌공 심택현의 손자로, 정조조에, 예조판서를 지내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시호는 정정이다. 

 

7. 심능악은, 예조판서 정정공 심풍지의 차남으로, 순조조와 헌종조에,

이조, 예조, 병조, 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판돈녕부사를 지냈으며, 기로소에 들었다. 

 

8. 심의면은, 병조판서 심의겸의 10세손이고, 심정세의 8세손으로, 예조판서 정정공 심풍지의 막내 삼남인 심능달에게 입양되어,

심광세의 8세손이 되었다. 

철종조에, 도승지,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겸 지의금부사를 지냈다.

 

9. 심의원은, 형조판서 심의면의 형으로, 고종조에, 삼사를 거쳐,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기로소에 들었다. 

 

10. 심경택은, 철종조와 고종조에, 한성부 판윤과 공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효정이다. 

 

11. 심승택은, 고종조에, 형조, 예조의 판서와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동지정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기로소에 들었다.

시호는 효헌이다. 

 

12. 심이택은, 이조판서 심능악의 손자로, 대훈위 영의정 의정대신 청녕공 문충공 심순택의 동생이고, 형조판서 심의면의 양자이다.

철종조와 고종조에, 의주부윤, 이조 참의, 승지, 대사성, 개성부 유수, 전라도 관찰사, 광주부 유수, 한성부 판윤,

이조, 예조, 형조, 호조, 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협판내무부사<내무 협판, 이조 참판>, 판의금부사와 판돈녕부사를 지내고,

 세자시강원 우빈객, 좌빈객과 좌참찬, 홍문관, 예문관 양관 제학, 독판내무부사<내무 독판, 이조 판서> 등을 지냈다.

 

13. 심응택은, 흥선대원군의 장인인 민치구의 사위로, 흥선대원군과 동서지간이며, 

고종 황제의 이모부이다.

고종조에, 우부승지, 공조참판, 공조판서를 지냈다.

14. 심상훈은, 공조판서 심응택의 아들이며, 흥선대원군의 장인인 민치구의 외손자로, 고종 황제의 이종 사촌이다.

또한, 명성황후의 친족이다.

고종조에,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피신하고 있던 명성황후의 밀계()를 궁중에 전달하여 실행하게 하였으며,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경기도 관찰사로서, 독립당의 혁신정부를 전복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충청도 관찰사로 나아가, 동학교도() 탄압에 앞장섰다.

후에, 이조판서를 거쳐, 대한제국 때에는, 탁지부 대신, 내부대신, 법부 대신, 군부 대신, 판돈녕부사, 궁내부 대신, 궁내부 특진관, 육군 부장,

전환국 관리관, 한국 은행 총재, 토지 측량 관청의 총재관, 호위총관<호위대장>, 장례원경, 의정부 찬정, 참정 대신 등을 지냈다.

1902년에, 훈1등 태극훈장을 하사받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 조병세와 함께, 을사조약 체결의 무효화를 극력 상소하였으나, 실패하자,

민영환과 조병세의 뒤를 이어, 자결하려 하였으나, 고종의 만류로, 그만두게 되었고,

1908년에는, 사후에, 대훈위가 되었다.

시호는 충숙이다.
 

 

19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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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명세는, 붕당정치의 시조 서인의 시조 서인의 초대 영수 병조판서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로, 인조 반정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우고, 공조참판 겸 호위대장에 올랐다. 청운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숙이다. 

 

2. 심의신은, 예조판서 정정공 심풍지의 손자이고, 이조판서 심능악의 장남으로, 이조참판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3. 심평은,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참판을 지냈다. 

 

4. 심장은, 병조참판을 지냈다. 

5. 심공은, 이조참판, 지의금부사를 지냈다. 

 

6. 심관은, 공조참판을 지냈다. 

 

7. 심관지는, 오위도총부 부총관, 병조참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8. 심기태는, 병조참판을 지냈다. 

9. 심진현은, 예조참판을 지냈다. 

 

10. 심응태는,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지냈다. 

11. 심영택은, 예조판서 정정공 심풍지의 증손이고, 이조판서 심능악의 손자이며,

    청백리 이조 참판 심의신의 아들로,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지냈다. 

 

12. 심기택은, 호조참판으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병조참판에 올랐다. 

13. 심상목은, 예조판서 정정공 심풍지의 고손이고, 이조판서 심능악의 손자이며, 청백리 이조 참판 심의신의 손자이고,

    이조참판 심영택의 아들로,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 5대가 연속해서,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지낸 기록을 남겼다. 

 

14. 심의복은, 호조참판을 지냈다.

 

15. 심상학은, 호조참판 심의복의 손자이고, 예조판서 효정공 심경택의 아들로,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의 선진화된 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와,

    대사성, 이조참의, 예조참판, 협판내무부사<내무 협판, 이조참판>를 지내고,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5개국의 전권대신<주재 대사>으로 활동했다.

 

16. 심상찬은, 대사성, 이조 참의, 참판, 중추원 1등 의관을 지냈다. 

 

17. 심이지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18. 심육은, 준소의 영수 영의정 심수현의 장남으로, 소론 산림으로, 세자 시강원 찬선, 성균관 좨주, 형조참의, 형조참판, 호조참판, 대사헌을 지냈다.

    또한, 강화학파(양명학파)의 거두이기도 하였다.

 

19. 심악은, 준소의 영수 영의정 심수현의 차남으로, 준소의 거두 강화학파의 거두 소론 산림 찬선 좨주 형조 참판 심육의 동생이다.

    형조 참판과 병조 참판을 지냈다.

    그의 증손인 조선 후기 최고의 대실학자 심대윤의 저서에는, 심악이 이조판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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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붕당정치의 시조 서인의 시조 서인의 초대 영수 병조판서 청양군 심의겸의 증손으로, 아버지 심희세가 심열에게 입양되어,

공서의 영수 영의정 충정공 심열의 손자가 되었다.

경종의 국구 청은부원군 효숙공 심호의 할아버지이다.

1682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정원에 등용되어, 정언, 교리, 부응교, 응교를 지냈다.

1696년 승지, 예조참의를 거쳐, 1697년 전라도 관찰사에 올랐다. 고사에 밝았으며, 문장에 뛰어나고, 필법이 정묘했다.

심유; 1669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교리, 사간 등을 지냈다. 경사에 밝고, 시문과 음률에 능했다.

심능숙; 음보로 태인현감을 지냈다.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가문소설인 [옥수기]를 한문으로 써서, 1888년 국문본으로 번역하여, 9권을 간행했다.

 남영로의 [옥루몽]과 함께 애독되었다. 정조 대 8대 문장가의 일인이다.


청백리, 심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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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1791년-1845년. 생부는 능악. 자는 순흠. 예조판서 정정공 심풍지의 손자이고, 이조판서 심능악의 장남으로, 

 1810년[순조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829년 주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에 올랐다.

그뒤, 중궁전 승사관에 임용되고, 1836년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1838년 병조참판을 거쳐, 대사간, 이조참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조손 입기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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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판서 판돈녕부사 심능악과 영의정 심순택은, 조손이 기로소에 들었다.



 

숭정처사, 태백 5현의 일인, 심장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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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오현 제위(太白五賢 諸位)

-------- 각금당 정민공 심장세------------

각금당 심장세는, 명종의 장인 심강(沈鋼)의 증손이며, 서인의 영수 심의겸의 손자이다.

1594년에 태어나, 1660년에 몰했다. 자는 덕조(德祖). 호는 각금당(覺今堂).

1624년 이괄의 난 때, 포의로 임금을 호종하여, 금부도사가 되었으며,

1637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여 부사가 되었고, 정3품 당상 경연참찬관에 이르렀다.
학문과 덕행으로 절의를 지켜, 태백오현의 1인으로 불리워졌다. 증이조판서. 시호 정민(貞敏). 사덕사에 배향되었다. 

 

------- 포옹 문절공 정양-----------

1600년에 태어나 1668년에 몰했다. 자는 안숙(晏叔),호는 포옹(抱翁)ㆍ김장생 문인이다. 161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로 피난했다.

1661년 장령을 거쳐 시강원 진선에 이르렀다. 증이조판서. 시호는 문절(文節). 학덕으로 태백오현(太白五賢)의 칭을 듣고 사덕사에 배향되었다.

-------- 두곡 개절공 홍우정 ------------

두곡 홍우정은 형조판서 홍가신의 손자이며 이조판서 홍우원과 청백리 홍우량의 형이다.
1595년에 태어나 1656년에 몰했다.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 )이다.

161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학이 뛰어나 대신의 천거로 왕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그뒤 직장ㆍ공조좌랑 등의 벼슬이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숭정처사로 세인들의 존경을 받아 태백오현의 1人 으로 불리워졌다. 증이조판서. 시호 개절공(介節公) 문원서원에 배향되었다.

-------- 손우당 정민공 홍석 ------------

손우당 홍석은 증조ㆍ고조 양대 영의정에 증조부가 대제학을 지낸 명문 출신이다.

1604년에 태어나 1680년에 몰했다. 자는 군서(君敍),호는 손우당(遜愚堂)이다. 김집과 김상헌에게 글을 배웠다.

 김수항ㆍ송시열의 천거로 참봉이 되고 주부와 용담현령을 거쳐 세자익위사어에 이르렀다.

사림의 중망이 컸으며 절의를 지켜 태백오현의 일인으로 일컬어진다. 증이조판서,시호 정민(貞敏). 사덕사에 제향되었다.

문집과 예기유회,일성록ㆍ이기록ㆍ예총요설 등이 있다.

-------이오당 정민공 강흡은 내용이 많아 생략함-------------

 

 

농촌 계몽 운동 문학의 월계관, "상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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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본명 : 심대섭) 

생졸년;1901년-1936년. 호는 해풍. 같은 본종인 청송 심씨 지돈녕사사 심건택의 사위 조선 왕족 전주 이씨 후작 청평군 이해승의 누이인 이해영과

결혼했고, 중국에 유학을 갔다오기도 하였으며, 연극, 영화, 소설, 시, 집필 등 여러 분야에 다능했다.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한 때, 옥에 갇히어, 어머니께, 옥중 편지를 올리기도 하였다.

영화의 원작을 집필, 각색, 감독, 제작 등 일인 4역까지 하여, 한 때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조선일보, 경성 방송국 등 언론기관에 몸을 담기도 했다.

여러 장,단편 소설과 시를 써서, 신문에 연재하였다.

그 중 대표작인 장편 소설 [상록수]는 농민 계몽 문학으로, 젊은이들의 의식을 크게 일깨워줬다. 

특히, [상록수]는 우리나라 근대 소설 중에서는, 최고로 인기있고 대표적인 장편 소설이다.

또, 대표적인 시 [그 날이 오면]이 있다.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청송 심문의 과환 더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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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연속 문과 급제 [풍지, 능악, 의신, 영택, 상목] 

 

4대 연속 문과 급제 [구서, 항, 국현, 갱]
4대 연속 문과 급제 [충겸, 열, 희세, 권]

3대 연속 문과 급제 [유, 수현, 악]
3대 연속 문과 급제 [황, 수량, 공]
3대 연속 문과 급제 [명열, 관, 기태]

3부자 문과 급제 [이지, 능익, 능필]
3부자 문과 급제 [수현, 악, 필]

부자 판서 [수, 이조판서], [이지, 호조판서]
부자 판서 [의면, 형조판서], [이택, 이조판서]
부자 판서 [응택, 공조판서], [상훈, 이조판서]
부자 판서 [풍지, 예조판서], [능악, 이조판서]

 

형제 판서 [의면, 형조판서], [의원, 공조판서]

형제 병조판서 [의겸, 병조판서], [충겸, 병조판서]

 

조손 판서 [택현, 이조판서], [풍지, 예조판서]

조손 판서 [풍지, 예조판서], [의면, 형조판서]

조손 이조판서 [능악, 이조판서], [이택, 이조판서]

3대 연속 이조참판 [의신, 영택, 상목] 

 

부자 참판 [관, 공조참판], [기태, 병조참판]

 

형제 형조참판 [육, 형조참판, 호조참판], [악, 형조참판, 병조참판]

여덟 명의 문과 장원 급제 [이지, 의승, 경택, 상진, 악, 국현, 충겸, 반]

문과 급제 ; 총73명
 

 

현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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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평] 

 

[익효공[심강]의 후손에 대표적인 인물로, 1941년 4월 1일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율정리 출생, 1959년 대전고등학교 졸업,

1960년 ~ 1966년 2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6년 9월 제4회 3급 공채 시험(행정 고등 고시) 합격,

1967년 4월 1일 ~ 1974년 4월 9일 국무총리 기획조정실 사무관, 서기관, 국장(당시 대통령 : 박정희, 당시 국무총리 : 정일권, 백두진, 김종필),

1974년 4월 10일 ~ 1978년 1월 20일 청와대 행정관(당시 대통령 : 박정희),

1978년 1월 21일 ~ 1978년 9월 20일 국무총리 기획조정실 조정관(차관보급, 당시 대통령 : 박정희, 당시 국무총리 :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1978년 9월 21일 ~ 1980년 3월 3일 경기도 북부 출장소장,

1980년 3월 4일 ~ 1981년 3월 23일 제12대 경기도 의정부시 시장(관선),

1981년 3월 24일 ~ 1983년 12월 26일 제22대 충청남도 대전시 시장(관선),

1984년 1월 10일 ~ 1984년 12월 24일 국방대학원 수료,

1985년 1월 17일 ~ 1986년 3월 7일 부산직할시(부산광역시) 기획관리 실장,

1986년 3월 8일 ~ 1986년 10월 14일 제24대 대전직할시 시장(관선),

1986년 10월 15일 ~ 1988년 5월 19일 청와대 사정 비서관(당시 대통령 : 전두환), 청와대 민정 비서관(당시 대통령 : 전두환, 노태우),

1988년 5월 20일 ~ 1990년 12월 27일 제24대 충청남도 도지사(관선),

1990년 12월 28일 ~ 1992년 3월 30일 제9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차관급) <국무총리 바로 다음의 직책, 김대중과 노무현, 박근혜 정권 때의 국무조정실장(장관급), 이명박 정권 때의 국무총리실장(장관급), 미국의 국무부 장관에 해당됨, 행정부 내각 최고의 실세직이었음, 당시 대통령 : 노태우, 당시 국무총리 : 노재봉, 정원식>,

1992년 3월 31일 ~ 1993년 2월 24일 청와대 행정 수석(노태우 대통령 당시 장관급이었음, 청와대 선임 수석,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때의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에 해당됨, 청와대 왕수석으로 불림, 청와대 최고의 실세직이었음, 당시 대통령 : 노태우),

1995년 3월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창당 발기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창당, 자유민주연합(자민련) 김종필 총재 특보(특별 보좌역),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초대 민선 충청남도 도지사,

1997년 11월 3일 공주대학교 대학원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 취득,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재선 민선 충청남도 도지사, 1999년 1월 초대 충청남도 테크노파크 이사장,

1999년 1월 29일 충남대학교 대학원 명예 행정학 박사 학위 취득, 제2건국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

1999년 국회원내교섭단체이며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와 공동 집권 여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부총재 겸 당무위원(최고위원),

2000년 2월 ~ 2000년 4월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2000년 12월 13일 러시아 헤르젠대학교 대학원 명예 경제학 박사 학위 취득,

2001년 제1회 사이버 전국 체전 조직위원회 위원장, 월드컵 성공 국민운동본부 명예 총재,

2002년 7월 1일 ~ 2006년 3월 24일 민선 3연선 충청남도 도지사, 대한민국 최초의 민선 3연선 도지사, 대한민국의 관선·민선 4선 도지사(충남도지사 심대평, 경남도지사 김혁규, 경북도지사 이의근),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장수 도지사(13년 4개월), 국민중심당 창당 준비위원회 위원장,

2006년 1월 17일 국민중심당 창당, 2006년 1월 17일 ~ 2008년 2월 12일 국민중심당 초대 대표,

2006년 5월 ~ 2006년 6월 2006 지방 선거 국민중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

2007년 4월 25일 ~ 2008년 2월 12일 제17대 재보궐 선거 대전 서구 을 국민중심당 초선 국회의원, 국회 환경노동 상임 위원회 위원,

2007년 11월 제17대 대통령 선거 국민중심당 대통령 후보,

2007년 12월 무소속 이회창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고, 자신은 대통령 후보를 전격 사퇴하여, 국민중심당 대표로서, 제17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이회창 대통령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역,

2008년 2월 1일 이회창 자유선진당 창당준비위원장과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가 함께 자유선진당 창당,

2008년 2월 12일 국민중심당과 자유선진당이 합당함, 2008년 2월 12일 ~ 2009년 8월 31일 자유선진당 초대 대표(이회창 총재와 공동대표),

2008년 2월 12일 ~ 2008년 5월 29일 제17대 대전 서구 을 자유선진당 초선 국회의원,

2008년 3월 ~ 2008년 4월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 자유선진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

2008년 5월 30일 ~ 2009년 8월 31일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 충남 공주, 연기 자유선진당 재선 국회의원, 국회 국방 상임 위원회 위원,

2008년 8월 6일 ~ 2009년 8월 31일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의 국회 공동 원내 교섭 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 자유선진당 대표,

2009년 8월 31일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의 국무총리 기용에 반대한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와의 불화<심대평 대표는 지역 발전과 큰 정치를 위해, 국무총리가 되고자 하였고, 그것이 성사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나, 이회창 총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강소국 연방제의 정책 연대없이는 심대평 대표가 국무총리로 가는 것을 반대하여, 무산되었다고 함, 또, 심대평 대표는 이회창 총재의 당 운영 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비판함.>로,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직 사퇴와 동시에, 자유선진당을 탈당함,

또, 2009년 9월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의 국회 공동 원내 교섭 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 도 탈퇴함, 

 2009년 8월 31일 ~ 2010년 3월 25일 제18대 충남 공주, 연기 무소속 재선 국회의원, 2010년 2월 25일 국민중심연합(국중련) 창당 준비위원회 위원장, 

2010년 3월 25일 국민중심연합(국중련) 창당, 2010년 3월 25일 ~ 2011년 10월 10일 제18대 충남 공주, 연기 국민중심연합 재선 국회의원,

2010년 3월 25일 국민중심연합(국중련) 초대 대표 겸 원내대표 겸 충남도당 위원장,

2010년 5월 ~ 2010년 6월 2010 6.2 지방 선거 국민중심연합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역임,

2011년 10월 10일 자유선진당 · 국민중심연합 양당 합당수임기구 합동 회의를 열어, 자유선진당과 국민중심연합을 새로운 자유선진당으로 신설 합당하고, 심대평 국민중심연합 대표를 새 자유선진당의 초대 대표(단독 대표, 단일지도체제)로 추대함

 2011년 10월 10일 ~ 2012년 5월 29일 제18대 충남 공주, 연기 자유선진당 재선 국회의원,

2011년 10월 10일 새 자유선진당 초대 대표최고위원, 2012년 2월 ~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자유선진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역임, 2012년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처음 신설된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에 자유선진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김대중 정권 때, 교육부 장관, 노무현 정권 때, 국무총리, 5선 국회의원, 민주당 최고위원, 민주당 상임고문의 경력을 지닌, 친노의 거물 민주통합당 이해찬 후보에게 그만 고배를 마시고야 말았다. 세종시민은 대부분이 심대평 대표의 고향 지역구민으로, 연기군민과 공주시민, 청원군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도시와 시골 농촌이 혼재되어 있는 농촌도시이다. 이해찬 후보의 고향은 충남 청양으로, 세종시가 고향이 아닌데도, 세종시민은 대부분 이해찬 후보가 중앙에서 정치하다가 시골로 내려왔으니, 뽑아줘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심대평 대표의 거의 될 뻔했던 국무총리의 경력이 이회창 총재에 의해 무산된 것이 참으로 아쉽지 않을 수가 다. 또한, 심대평 대표의 자유선진당은 세종과 대전, 충북에서는 단 1석도 건지지 못 하고, 충남에서만 이인제, 이명수 등 단 3석만 건졌으며, 비례대표 2석까지 합쳐, 총 5석의 초라한 성적표를 올렸다. 그 이유는, 대선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치뤄지는 대선 전초전의 성격때문에, 충청 표심이 모두 새누리당(구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으로 돌아선 것도 있겠고, 자유선진당에서 이렇다 할 유력 대권 후보를 키우지 못 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회창 전 대표와 심대평 대표의 심한 불화와 이회창 전 대표 측이 자꾸 심대평 대표를 뒤흔든 것도 자유선진당 참패의 큰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심대평 대표가 2009년 자유선진당을 탈당할 때에도, 이회창 총재가 국무총리를 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탈당한 것만은 아니다. 이회창 총재의 측근들이 자꾸 심대평 대표를 출당시켜야 한다는 등 심한 언행을 퍼붓고, 심대평 대표를 뒤흔들고, 자존심을 구기고, 구석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심대평 대표도 할 수 없이 거기에 반발하여, 탈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제19대 총선 바로 다음 날인 2012년 4월 12일,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는 이번 총선 참패의 모든 책임을 지고, 전격 자유선진당 대표직을 사퇴하기에 이른다.

2012년 5월 29일 자유선진당이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변경함,

2012년 7월 선진통일당 상임고문, 2012년 11월 16일 선진통일당 새누리당으로 흡수합당됨, 2013년 3월 22일 조선어학회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명예위원장,

 2013년 4월 14일 건양대학교 부설 세종미래비전연구원 초대 원장 겸 건양대학교 교양학부 석좌교수, 2013년 9월 2일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이자 정부위원회인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초대 위원장(총리급)] 

심대평과 그의 동생 파라다이스산업(파라텍) 대표이사 심대민이 있다.

심대평과 심대민의 아버지는 심재갑으로, 교장과 교육감을 지냈고, 심대평의 장남은 심우정으로, 검찰청 검사이고, 차남은 심우현으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막내 삼남은 심우찬으로, 육군 소령이다. (심연원 - 심강 - 심인겸 - 심엄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택현의 후손)  

---------인겸 후손-------

광세-은-약명 후손에

심갑보[삼익 LMS 부회장, 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위원, 전경련 부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중앙노동위원회 위원, 대한상공회의소 노사인력위원장, 영남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명예 박사, 삼익 THK 주식회사 대표이사 부회장, 청송 심씨 대종회 부회장]

익의 후손에 재덕[대흥토건 전무] 재희[대흥토건 사장] 재욱[이사관] 재후[박사, 대학 학장] 4형제,

병조참판 기택 후손에 경섭[고교장] 재희[박사] 재철[박사] 3부자,

척의 후손에 재문[이사관] 재룡[사무관] 형제,

약섭 후손에 심상길[의학 박사, 의사] 심명섭[박사, 교수] 심지섭[의학 박사, 의사] 3부자,

부윤 총 후손에 재복[중앙양조 회장], 재영[대령], 재건[이사관], 우섭[교수], 재운[중도학원 이사장], 우섭[이강상사 사장],

능식-의년 후손에 재국[청우로프 사장] 재순[주택은행 지점장] 재진[서울대 졸]

심재황[일명 심재륜, 1944년 1월 5일 충북 옥천 출생, 1962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66년 서울대학교 법대 졸업,

1967년 제7회 사법고시 합격(차석), 서울지검 검사 직무대행,

1969년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현재의 사법연수원) 석사(수석 졸업), 변호사 개업, 육군 법무관,

1972년 서울지검 검사(2급), 1975년 법무부 인권과장(2급), 1980년 법무부 검찰국 검사(2급), 1981년 대검찰청 검찰연구관(2급),

1982년 부산지검 밀양지청 지청장(1급, 법무부 차관보급), 1983년 부산지검 형사제3부장검사(1급, 법무부 차관보급),

1985년 대검찰청 감찰제1과장검사(1급, 법무부 차관보급), 1986년 대검찰청 중수제2과장검사(1급, 법무부 차관보급),

1987년 법무부 법무심의관(1급, 법무부 차관보급), 1988년 ~ 1990년 서울지검 특수제1부장검사 겸 초대 서울지검 강력부장검사로서, 국내 최대의 폭력조직으로 알려졌던 서방파 두목 김태촌(金泰村)을 구속하는 등 폭력조직 소탕에 상당한 실적을 올림, 1990년 대전지검 차장검사(1급, 법무부 차관보급), 1991년 서울지검 남부지청 차장검사(1급, 법무부 차관보급), 1992년 서울지검 제3차장검사(법무부 차관급), 1993년 대전고검 차장검사(법무부 차관급), 1993년 대검찰청 감찰부장검사(법무부 차관급), 1993년 대검찰청 강력부장검사(법무부 차관급), 1994년 9월 ~ 1995년 9월 대전지검 검사장(법무부 차관급), 1995년 9월 ~ 1997년 1월 광주지검 검사장(법무부 차관급), 1997년 1월 ~ 1997년 3월 인천지검 검사장(법무부 차관급), 1997년 3월 ~ 1997년 8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검사(대검 중수부장) <법무부 차관급, 검찰내 최고의 실세 요직>로 발탁되어, 한보사건을 재수사하여, 집권세력의 반대를 뿌리치고, 당시 현직 대통령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을 구속한 것으로 유명함, 1997년 8월 ~ 1999년 2월 대구고검 검사장(법무부 차관급, 검찰총장급, 대검찰청 차장급), 1999년 1월 28일 대전법조비리사건 때, 이종기 변호사 수임사건과 관련한 항명사건으로, 법무부 검사징계위원회로부터, 직무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99년 2월 3일 면직 처분을 받음, 1999년 11월 변호사 개업, 2001년 10월 무고임이 밝혀져, 서울고검 검사장(대검찰청 무보직 고등검사장, 법무부 차관급, 검찰총장급, 대검찰청 차장급)으로 복직하고, 2001년 10월 ~ 2002년 1월까지 부산고검 검사장(법무부 차관급, 검찰총장급, 대검찰청 차장급)을 지내고, 명예 은퇴함, 현재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중, 각종 기업, 로펌의 사외 이사와 고문도 겸임중, 대법원장상과 홍조근정훈장을 수여받음, 지절 높은 검사장으로 세간에 이목을 집중 시킨 법조계의 거물임, 검찰 재직 시절 주로 특수수사 분야에서 일하면서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서 정치권이나 검찰 수뇌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사를 밀고나간 것으로 유명함, '국민검사', '국민 중수부장', '원조 특별수사통', '강골 대쪽 검사의 표상' 으로 불림.] 4형제,

능식-의년-경택 후손에 종섭[유도회 회장] 재건[대성화학 사장] 부자. 진섭[종섭 동생, 한국정유 전무 이사] 재강[교수, 박사] 부자,

광세[응교]-총[광주부윤]-약황[현감]-부의 후손에 재완[영남대학교 대학원 원장, 국문학 박사, 명서예가] 재헌[대구불교회장] 재인[재일본 경북도민회장] 3형제, 영희[박사, 교수],

 

심재완[대한민국 최고의 국문학자, 대한민국 국문학의 아버지, 대한민국 국문학의 대가, 호는 모산(慕山), 1918년 2월 8일 경북 선산 출생,

1933년 선산공립보통학교 졸업, 1933년 ~ 1940년까지 경성사범학교 졸업, 1940년 ~ 1945년 국민학교(경북 문경 서부초등학교) 교사,

1946년 ~ 1955년 중,고등학교 교사, 1954년 청구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56년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석사 학위 취득,

1964년 9월 ~ 1967년 청구대학교 교수, 1967년 ~ 1983년 영남대학교 교수, 영남대학교 학생처장,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1972년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학장, 1972년 7월 10일 한문학사 역대 최고의 결정판이자 한국문학사 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역대교본시조전서' 와 '시조의 문헌적 연구' 저술 · 간행, 1973년 영남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학위 취득,

1973년 대한민국 학술원상 수상, 1976년 ~ 1981년 도남학회 이사장, 1976년 서예대전 초대작가, 운영위원장, 심사위원장,

 1978년 ~ 1983년 영남대학교 신라,가야 문화 연구소 ·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1981년 도계서원 원장, 영남대학교 대학원 원장, 한국어문학회 대표이사,

1983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1984년 ~ 1986년 대구대학교 한의대 학장, 1986년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1989년 모산 심재완 선생의 위대한 역사적인 업적을 기리고, 계승 · 발전시키기 위해, 모산학술재단 · 모산학술연구소 창립,

1992년 금옥장학회 이사장, 1995년 낙동서원 원장, 2001년 이호우 · 이영도 문학기념사업회 회장, 2002년 정포원임고 서원 원장,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 2011년 11월 15일 별세, 2011년 11월 19일 사회장(5일장)으로, 엄숙하게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모산 심재완 선생은 한민족 문화의 정수인 한국 고시조의 자료정리와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며, 

 대한민국 국문학의 대부로서, 한국문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서로는, '석보상절 영인해제', '청구영언 연민본 영인해제', 민속학 연구의 귀중한 업적인 '한국의 관모', 문학사 역대 최고의 결정판이자

한국문학사 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역대교본시조전서' 와 '시조의 문헌적 연구' 등이 있다.]

 

심명필[1950년 8월 24일 경북 구미 출생, 경북고등학교 졸업, 1973년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197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토목공학 석사 학위 취득, 1984년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대학원 토목공학 박사 학위 취득, 1984년 12월 ~ 1985년 7월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연구원, 1985년 인하대학교 공대 사회기반시스템공학부 교수, 1990년 12월 ~ 1992년 1월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방문교수,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환경정의 이사, 한국물포럼 이사2003년 ~ 2005년 인하대학교 공대 학장, 2005년 ~ 2007년 인하대학교 대학원 원장, 2005년 ~ 2007년 대한토목학회 부회장, 2007년 3월 ~ 2009년 2월 한국수자원학회 회장, 2008년 환경부 주요정책 자문위원, 국토해양부 주요정책 자문위원, 2009년 4월 17일 국토해양부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본부장(장관급,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급, 이명박 정권의 최고 실세직), 2012년 12월 31일 국토해양부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본부장(4대강 장관) 퇴임(약 3년 8개월동안 재직), 2014년 1월 ~ 2014년 12월 제46대 대한토목학회 회장 

 

※ 심명필 장관2009년 4월 20일 4대강살리기사업의 首長(수장)인 추진본부장(장관급)으로 취임한 이후, 많은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도

각종 자문회의, 토론회, 간담회, 인터뷰 및 현장 점검 등 900여회의 다각적인 대외 활동을 통해 차질 없이 사업을 마무리하는 데 소임을 다하였다.

또한,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쌓은 기술과 경험을 통해 축적된 물 관리 기술의 해외 전파 및 수출을 위해 올 한 해 동안 태국, 모로코, 파키스탄, 페루,

베트남 등 8개국을 방문하여 수자원 기술협력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으로도 긍정적 성과를 남긴 바 있다.

특히, 2012년 3월 모로코와의 ‘수자원 관리 및 4대강 사업의 기술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 체결을 시작으로, 올 한 해 동안 총 5개 국가와 MOU를 

 체결하였다. 

* 모로코(2012년 3월 26일), 파라과이(2012년 5월 29일), 태국(2012년 8월 14일), 페루(2012년 10월 16일), 알제리(2012년 11월 13일)

 

] 부자,

 

{모산 심재완 선생의 다섯 아들 : 심홍필[택산 대표이사 사장], 심정필[미국 조지아 주립대학교 교수], 심명필[4대강 장관], 심원필[국립 안동대학교 교수], 심문필[프랑스 거주 화가]}

 

{모산 심재완 선생의 장남 심홍필 택산 대표이사 사장의 장남 심준형[네오위즈게임즈 부사장]과 차남 심준범[CJ E&M 차장]}    

광세-무의 후손에 재윤[박사], 문섭[선장],

정세 -----술지 후손에 재순[경찰국장],
정세----단 후손에 재영[약학 박사, 약사] 재열[박사] 형제.
정세--언택-상은 아들 대섭[부산광역시 이사관], 상환 아들 우섭[의학 박사, 의사] 정섭[원양약품 사장] 영섭[한국중공업 부장] 명섭[한중원자력 부장] 4형제, 상석 아들 봉섭[영남의대 병원 부원장, 의학 박사, 의사], 상기 아들 문섭[의학 박사, 의사] 딸 연수[부군 이동원 교수] 딸 명숙[부군 대우 옥포 조선 전무] 3형제 자매

공조참판 명세----인서 후손에 원섭[박사, 교수], 

경연참찬관 태백오현 장세 -----후손에 두섭[이진건설 대표], 정일[상영정 대표이사].

** 지금까지의 거명된 모든 인물은 심의겸의 혈맥이다. 심의겸의 아들 심엄이, 심의겸의 형인 군수 심인겸의 양자로 입양 계대되었기 때문이다.***


----------지겸 후손---------

사섭[이사관, 공사, 교수] 재홍[의학 박사, 의사] 부자, 충섭[송산건설 대표] 재광[의신학교 이사장] 부자, 강섭[이사관], 강섭의 아들 재언[삼성 이사] 재언 여동생 우진[부군 판사], 문섭[대령] 영철[박사, 태평양 연구소장] 부자, 양섭[고교장] 양섭 조카 재원[대한올림픽 상임위원], 은재[교수, 박사] 은재 부인 김민숙[박사, 교수] 은재 동생 성재[박사, 교수] 성재 여동생 미혜[박사], 재섭[대우 이사] 재집[LG 영국 지사장]형제.

------신겸 후손---------

신겸-----약해 후손에 윤섭[고교장]
신겸----정방 후손에 상문[ 이사관] 종섭[행시] 부자, 상문 동생 상헌[한국 전기통신공사 연수원 교수]
신겸----정창 후손에 중섭[교수], 재훈[대우 상무], 재훈 삼촌 황섭[시인],
신겸-이-----광 후손에 성섭[서기관] 명섭[고교장] 용섭[지하철 감사실장] 형제, 달섭[이사관] 경섭[대령] 형제

---------충겸 후손---------

병조판서 충겸-------수익 후손에 응섭[부이사관, 성남시 기획실장, 청송 심씨 대종회 부회장, 안효공 종회장] 재옥[수원시 관리과장, 교수]

심재인[1952년 1월 12일 경기도 수원시 출생, 1964년 수원 지동초등학교 졸업, 1967년 수원 북중학교 졸업, 1970년 수원 수성고등학교 졸업,

1970년 삼성전자 입사, 1976년 수원시청 총무국 회계과 근무, 1977년 경기도청 기획담당관실, 총무과, 감사과 등에서 근무,

1992년 안양시 동안구 시민과장, 1993년 경기도의회 사무처 의전관, 경기도지사 비서실 의전서기관, 인사서기관, 경기도 건설본부 총무부장, 서울사무소장, 2000년 경기도지사 비서실장, 2002년 8월 16일 경기도 환경정책과장, 2003년 8월 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2004년 12월 ~ 2006년 12월 경기도 지방공무원 교육원 초빙 교수, 2005년 2월 14일 경기도 과천시 부시장, 2007년 경기도 문화복지국장,

2007년 8월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인사조직학 석사 학위 취득, 2007년 12월 24일 ~ 2008년 12월 30일까지 경기도 포천시 부시장,

2007년 12월 24일 ~ 2008년 6월 30일까지 경기도 포천시장 권한 대행, 2008년 12월 30일 ~ 2009년 7월 3일까지 경기도 파주시 부시장,

2009년 7월 3일 ~ 2010년 3월 3일까지 경기도 자치행정국장, 2009년 9월 협성대학교 객원교수, 2009년 10월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상임위원,

{주요 상훈 : 대통령 근정포장, 국무총리 1회, 행정안전부 장관 1회, 경기도지사 3회 모범공무원 표창, 경기도청 노동조합 선정

 '2009 존경받는 간부공무원' 대상 수상}, 2010년 3월 8일에, 2010 6.2 지방 선거 수원시장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10년 7월 8일, 제4대 경기신문 사장으로 선임되어, 2010년 7월 15일, 취임하였다. 2010년 9월 2일, 한나라당 경기도당 정책본부 부본부장] 3부자, 재명[국방부 서기관]

---------효겸 후손-----------

효겸-------수점-양---능숙 후손에 용섭[문화재 전문위원] 종섭[중앙대학교 병원장, 의학 박사, 교수, 의사] 형제, 우섭[대령], 상기[박사],
효겸------옥현 후손에 상무[박사, 교수], 상훈[박사], 심갑섭[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석사, 한국방송공사 KBS PD, KBS 편성실장, KBS 광주광역시 · 대구광역시 총국장, KBS 교향악단 · 국악관현악단 운영, 인천광역시 부평풍물축제 위원장, 대경대학 학장(총장), 인천문화재단 제2대 대표이사]
효겸----------수진 후손에 용섭[부평 경찰서장]

효겸 ----조---수정 후손에 일섭[법무사] 백섭[시정 자문 위원] 형제, 일섭 장남 재창[초등학교 교감] 차남 재승[교육 행정 사무관] 형제 

 

 

 

  [참고 : 한국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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